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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y 21. 2023

마트료시카가 되지 않으려면

20대의 나로부터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상'형'이자 이상'향'으로 꼽는 '긍정적인 사람'.


일전에 자신에게 확신과 긍정을 갖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다. 미래를 말하는데 걱정보다 기대로 가득 찬 그의 눈빛에서 엄청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되려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은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에 따라 근거 있는 고집이 근거 없는 아집으로 변하기도 하고, 체력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변화 가능성 제한되기도 한다. 금껏 만나온, 걱정보다 기대를 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자신을 '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본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영감을 받으면 그로 인해 재생산된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때론 아무 동력 없이 스스로 추진력을 뿜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가능성을 확신함과 동시에 그 변화의 폭을 스스로 선택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아'.

이런 말이 때론 슬프게 느껴진다. 고집불통인 타인을 이야기할 때야 무심결에 내뱉는 말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면 슬퍼진다. 관성의 법칙을 깨고 나아가고 싶은데, 왠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직장인으로 산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그간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살아왔나를 고민하게 된다. 연차란 마일리지처럼 쌓이기도 하지만, 어떨 땐 러시아 인형처럼 같은 모양으로 겹겹이 쌓인 포장지 같기도 해서, 우연한 계기로 이 포장지가 다 벗겨지고 알맹이가 없는 걸 들키면 어떡하나 몰래 걱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는 모양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래야 포장하기 힘들어지고, 그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테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그런 힘든 일은 하기 힘들어."


신입 때엔 선배들이 업무 난이도가 있는 일을 회피하려 할 때, 속으로 화가 났다. 아니- 똑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잘하고 못하고 어디 있는지. 경력이 얼만데 뭐든 다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나도 연차가 쌓여가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기 힘든 것보다 잘 해내지 못했을 때의 그 부끄러움에 대한 걱정도 한몫한다는 걸 알았거든.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에 대한 걱정이, 변화가 가능한 사람으로서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것도.



얼마 전, 20대 후반 대리 시절나눴던 어느 차장님과의 신년 담화(?)가 떠올랐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차장님은 해가 바뀌고 첫 근무날, 직원들과 회의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면서 각자 새해 다짐 같은 게 있냐고 물으셨다. 그때 나는, '변수에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다. 갑자기 그 일화가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는데, 한편으론 과거의 내 생각과 마주하니 신했다.


당시 나는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다양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때에 내가 의지하고 존경했던 선배들은 모두 변수에 강했다. 일반적인 일의 진행방식에서 벗어나는 변수들이 등장했을 때, 그 선배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가끔 확실한 대응책이 없을 때엔 오랜 경험에서 가장 비슷한 판례(?)들을 찾아내 바로바로 해답을 알려줬다. 그들에게 존경심이 절로 생겼고, 그로 인해 당시 내 새해다짐 변수에 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변수에 능하려면 사실 다양한 경험을 겪어야 한다. 변수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일을 하는 동안 어떨 때는 아주 크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거나, 눈물을 쏙 빼고 나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라, 살며 예측불가능한 변수에 맞서기 위해선 경험의 바운더리를 넓혀야 한다. 스스로의 변화를 계속 시험하고 관찰해야 한다.



코로나가 사실상 종식 선언 되면서, 그동안 제한됐던 것들 중 대부분이 자유를 맞았다. 교직원 식당에 칸막이가 걷히고 나니, 옆 사람의 말이 너무 잘 들리는 것도 이상고 앞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것도 낯설었다. 마스크를 많이들 벗을 때에도 어색했는데 칸막이까지 없어지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개방조차 어색한 지경. 어쩌면 그런 제한들과 함께, 막혀버린 입과 무거워진 엉덩이로 나도 관성의 법칙에 오랜 시간 조용히 순응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어린이들의 말랑말랑함에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느껴진다. '무엇이든 할 수, 될 수 있어요'라고 이마에 쓰여있는 것만 같은 말랑말랑함.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조금은 말랑말랑한 사람이라 여기는 확신이 나를 긍정으로 이끌 것이라 믿는다. 바쁜 시간을 쪼개 배울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지금보다 조금은 젊 빛나던 20대의 시간으로 몸과 마음을 되돌릴 순 없지만, 적어도 그때 내가 품었던 생각 잊지 말아야지.



변수에 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20대의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아 졌다.


적어도 그 친구에게만큼은 꼭 말해줄 수 있었으면. 같은 모양에, 크기만 커지는, 알맹이 없는 마트료시카 되지 않 노력하겠다고.


30대의 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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