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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y 28. 2023

거스름돈 500원 말고도

손바닥에 남은 것

두서없는 이야기지만, 요즘 김밥이 너무 맛있다. 라면을 먹어야 할 때면, 번거로워도 김밥을 따로 배달시키거나 굳이 나가서 김밥을 사 오곤 한다. 심지어 떡볶이 전문에서도 떡볶이를 안 시키고 김밥만 시킨다. 솔직히 이젠 라면보다 김밥이 더 좋다.


어릴 때는 그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 먹는 특별한 음식인데도, 엄청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어린이들에게 채소를 먹게 하기 위해 만든 음식이라 생각했던 듯.


배달로 자주 시켜먹던 당근잔뜩김밥, 너무 맛있잖아


운전을 하기 전까지는 학교와 집이 크게 멀진 않아서 날씨가 좋은 날엔 한 번씩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오가던 길목에 시장 하나가 있었고, 그곳에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는 소박한 김밥집이 있었다. 노점상에 가까운 가게였는데 간판도 따로 없었다. '할매김밥'이라고 현수막 하나만 가판대 아래에 걸어둔 정도. 가게 이름 그대로 꼬부랑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오로지 김밥만 파는 김밥집이었는데, 할머니의 김밥은 너무나 소박했다. 화려한 재료는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집에서 싼 김밥 느낌. 


할머니께서 불편한 걸음으로 가판대를 오가며 김밥을 싸실 때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느리지만 야무진 손길로 김밥이 완성돼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흥미롭기도 했다.


엄마는 먹거리가 잔뜩 늘어져있는 비싼 뷔페에 가서도 굳이 꼭 김밥은 맛봐야 할 정도로 김밥 애호가인데, 내가 가끔씩 사 가는 소박한 '할매김밥'을 유독 좋아했다. 그래서 퇴근하다가 김밥집을 지나가기 전에, 엄마 생각이 나면 김밥을 몇 줄씩 가곤 했다. 엄마는 미리 준비해 둔 저녁거리가 있어도, 내가 김밥을 사가면 김밥을 먹기 위해 저녁을 덜 먹고 김밥을 더 즐겼다. 항상 넉넉하게 사갔는데 우리는 김밥을 남긴 적이 없었다.




러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계속 차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 그 시장을 지나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지도 모를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가을날, 날씨가 선선하니 마스크를 벗고 오랜만에 걸어서 출퇴근을 하자 싶어 길을 나섰는데 그 사이 할머니의 김밥집이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할머니의 가판은 검은 비닐에 덮여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간 내가 이 길을 너무 지나지 않았구나.'하고 괜히 죄송스럽기도 하면서, 마음  구석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할머니탈이 생겨 문을 닫 게 아니기를, 그저 남은 생은 좀 편 지내시려는 마음으로 장사를 접으신 것이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가끔 일찍 출근하는 날, 부서장님이 집에서 싸오신 김밥 한 줄을 꼭 나눠주신다. 딱 내가 좋아하는 순수한 맛.


사실 나에게 그 집 김밥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할머니소박한 김밥 맛 때문만은 아니다.

항상 '할매김밥' 집에 가기 전엔 지갑을 열어 현금을 확인했었다. 카드가 되는지는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계좌이체가 활발했던 때가 아니어서, 지갑에 현금이 없으면 근처 ATM기에현금을 아가했다. 김밥은 당시 한 줄에 1,500원이었고 할머니는 거스름돈을 위해 500원짜리 동전을 통 하나에 잔뜩 모아놓고 계셨다. 그래서 나도 종종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홀수로 김밥을 사는 날엔 항상 500원짜리 동전을 거스름돈으로 받았다.


그리고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할머니가 건네주신 500원짜리 동전에서 풍겼던 김밥냄새. 에 가득 모아두었던 동전 중 하나였을 뿐인데 동전을 건네받은 내 손바닥에선 기분 좋은 참기름 냄새가 났다. 얼마나 그 공간의 기운이 배였으면 동전에까지 그 냄새가 났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의 김밥 맛보다 동전에서 났던 김밥냄새가 기억에 더 선명하다.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본인의 고민거리를 잘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내가 그만큼 믿음직스럽고, 편한 가 보다.'하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들이 쌓여가니 퍽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이 많은 사연들을 품어줄 만한 사람인 걸까.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그들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답변에도 순수성이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교직원 집체 교육에서, 심리검사를 통해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조원공통된 특징 중 하나 다 성향상 나무보다 숲을 보려 한다는 점이었다.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를 관망하며 사람들을 챙기는 타입. '나 말고도 이 직장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좀 있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성향이 과연 스스로에게 장점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가, 나도 좀 그 자의 숲에 있는 나무로 봐주면 안 되나. 저도 좀 모자란 나무긴 하거든요.



며칠 전, 거래처 관계자 한 분이 업무차 사무실에 오셨고 둘이서 업무협의를 진행했다. 웃긴 건, 업무 얘기를 하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분의 고충을 발견하고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참나. 야, 오늘 처음 뵀거든? 그리고 너보다 경력도 길고, 돈도 더 잘 버시고 훠-얼씬 잘 살고 계신 분인데 뭘 또 이야기를. 정신 차려!' 하고 속으로 외치며 깨달았다. 나는 나무보다 숲을 보는 게 아니라, 습관성 나무콜렉터였단 걸.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며, 다음 약속을 기약하돌아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 나는 이미 천성이 이렇게 태어난 사람라는 것을.


그러니 의심하 캐묻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대나무숲, 사연수집가로서의 숙명을.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부담 없이 찾는 외식거리 김밥 아니려나. 그런 김밥을 나는 너무나 사랑하고.


어쩌면 나를 찾는 사람들도 그런 맛에서 날 찾는 게 아닐까. 뭔가 소박한데 부담 없고 쉽게 질리지 않는.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나니 어이없게도 조금 욕심이 났다. 연이라는 것이 언젠가 모종의  또는 저 자연스러운 순리로 멀어질 수도 있을텐데, 그리 되더라도 나의 숲 속 사연품은 나무 중 하나쯤은 나의 안부를 조금이나마 궁금해해줬으면 하고. 내가 '할매김밥' 할머니의 무탈을 기원하듯이.


그리고 바라건대 잠시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갈 때에, 다시 챙겨 간 그 사람의 마음에서 뭔지 모를 기분 좋은 흔적이 남는다면 참 좋겠다.


'할매김밥'에서 돌려받, 거스름돈에 묻혀온 손바닥 가득했던 참기름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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