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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23. 2023

delay daily laundry

좀 미뤄도 괜찮아

퇴근을 하고 집에 막 도착해 주차를 하려는데, 주차해야 할 곳에 고양이 두 마리가 떡하니 비를 맞은 채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잔뜩 날이 선 모양이 가만 보니, 영역싸움을 하고 있는 듯했다. 차를 가까이 대도 두 녀석 다 도망갈 기색이 없었고, 신경전은 꽤나 팽팽했다. 결국 우산을 쓰고 가까이 다가가 손을 휘저으니 그제야 두 녀석 다 자리를 옮겼다.


주차를 하고 나서보니, 두 녀석은 자리만 옮겼을 뿐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대치 중이었다. 지긋지긋하리만큼 지속되던 비에 사람들도 날이 서있는데, 너희도 마찬가지구나. 원래 이렇게 비가 오는 때에는 잘 안 싸우던 녀석들이었는데. 장기간의 폭우가 여러 생명체를 힘들게 한다.


내내 그르렁거리는 소리, 비도 오는데 그만 하시죠.


지난주 주말, 일주일 간의 휴가를 마치고 귀국과 동시에 비 내리는 하늘과 마주했다. 그때부터 본 나도 는데, 지난주부터 계속 비를 봐왔던 사람들은 얼마나  비가 지겹고 야속했을까. 여행을 다녀오고 충전이 되어 근무할 거라 생각했거늘, 우중충한 하늘과 쏟아지는 비가 문제였던지 밀린 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분은 내내 꿀꿀했다. 내 맘대로 맘껏 자유롭게 다니던 여행에서 돌아와 많은 사람들과 관계 속에 일을 하러 돌아오니 의외로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차적응 다음으로 찾아온 인간적응.


나는 가급적 이국의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빨리 지나가려 하거나 거리를 두는 편이다. 희한하게도, 한국어가 들리는 순간 왠지 모르게 반갑기보다는 스트레스가 됐다. 그냥 그곳에서만큼은 철저히 이방인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희한하게도,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보기 힘들었다. 어딜 가나 중국인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인도 꼭 있었는데 이번엔 한 5명은 봤으려나.


그래서였나. 국 후 다시 저울질하는 세상으로의 복귀가 힘들었다. 번 주 유난히 의견을 묻는 척하며 유도신문을 걸어오는 이들이 많았다. '답정너'식의 유도성 질문과 그리고 그것에 놀아나지 않으려는 나의 신경전. 나는 그런 머리 아픈 대화가 싫어, 유명하지 않은 조용한 여행지를 골라 다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선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영어와 몸짓이 전부다. 오히려 돌아온 이곳은 말은 통하지만, 숨은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다시금 피곤해졌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기내 엔터테인먼트(좌석 앞에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터치스크린)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다. 항상 영화는 기본적으로 2~3편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엔 이북리더기를 챙겨가서 그런지 오가는 동안 딱 한 편씩의 영화만 봤다.


떠날 때 본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였고, 돌아오는 길에 본 영화는 일본영화 [강변의 무코리타]였다. (참나- 갔던 여행와는 다르게, 오갈 때 본 영화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그리웠나 봄)


출처 : Daum 영화


[브로커]는 생(生)에 관한 영화였다.

극장에서 개봉할 때 바빠서 못 봤는데, 여행 중에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버림받은 인생이라 생각하는 넷, 아니 다섯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고 어느 밤, 잠을 청하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태어나줘서 고마워"란 말을 주고받는다. 자신의 아기 '우성'을 포함한 모두에게 "태어나줘서 고마워"란 말을 건네는 아기엄마 '소영'.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뒤,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누구보다 씩씩한 아이 '해진'이 애틋한 목소리로 "소영아, 소영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란 말을 그녀에게 건넨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평점이 낮은 영화였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을 의미 있게 봤던 나에겐 썩 나쁘지 않은 영화였고 영화를 통틀어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


반대로 귀국하는 길에 본, [강변의 무코리타]는 '사(死)'에 관한 영화였다. 일본에선 2021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우리나라엔 올 8월 개봉예정이었다. 죽은 이들에 대해 갖가지 감정을 갖고 사는 어느 마을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와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솔직히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지 않아 영어자막으로 본 탓에, 내용이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 결정적인 내용은 아닌 짧은 일화지만, 영화 내용이 나와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다음 단락을 건너뛰시길 -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묻힌 곳에 다녀온 뒤 택시를 타는데 택시기사는 여자와 아이를 보고, 자신의 죽은 아내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의 죽은 아내를 두고, "그녀는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어요"라고 한다. 알고 보니 그는 예전에 폭죽 만드는 일을 했었고, 아내가 죽은 뒤 그녀의 유해를 곱게 갈아 폭죽에 섞어 불꽃놀이 하늘에 날려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말하는 내내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영화 속에선 화장 후에 고인의 유해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죄가 되지만, 곱게 갈아 장례를 치러주면 죄가 아니라고 나온다.) 그나저나, 밤하늘에 흩뿌려지는 장례라니. 꽤나 멋진 죽음이잖아.


그렇게 여행지를 오가며, 공교롭게도 생과 사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로운 생에 대한 위로와 죽음 뒤에 남겨진 자들의 공허함. 쓸쓸한 주인공들의 시선과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홀로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선 두 영화가 비슷했다.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들이 또 다른 관계 속에서 치유되고 있었다는 점도.




습한 날씨 탓에 꿉꿉한 생각들과, 한 번에 그 의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언어들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 복잡하고 끈적한 것들도 바싹 말 뒤 가루로 만들어, 불꽃놀이 하듯 밤하늘에 날려버릴 수 있을까.


장마철엔 빨래를 하기 싫어진다. 느 계절이건, 그날 입은 블라우스를 무조건 퇴근하고 바로 빨아 널어뒀다. 그러나 이번주엔 여독이 덜 풀린 건지 생각이 꿉꿉해서 그런 건지 빨래가 하기 싫어져서 옷걸이에 입었던 블라우스들을 며칠 동안 그대로 걸어놨다. 원래 나는 계획형 인간인지라 급적 하루일과를 다음날로 미루지 않고(오히려 당겨하면 했지), 고민거리도 대한 다음 날까지 안 갖가려 사람인데.


그런데 이런 기간엔, 좀 미뤄도 되지 않을까. 빨래도, 생각 정리도. 지금 이럴 때 잘못 빨면 오히려 냄새나잖아.



비가 시 그친 어느 저녁, 걸어둔 블라우스를 몰아 빨았다. 래를 하고 말리는 동안 이 꿉꿉하기 그지없는 끈적한 생각들도 자연스레 마르길 바랐다. 그 또다시 비. 그 사이  꿉꿉해진 생각과 관계들. 장마가 끝나면 폭염이 올 텐데 그즈음에는 든 것들이 바싹 마르려나.




여행의 후일담, 남은 여름의 계획, 겨울의 상상, 재즈음악을 틀어놓고 어깨춤 추기, 요즘 읽고 있는 책과 기억에 남는 구절.


장마가 지나고 난 뒤, 친애하는 이들과 그렇게 가볍고도 뽀송한 이야기들을 논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밤, 각자 바싹 말려 가져 온 장마철 묵혀 생각들유해를 늘어놓고, 다 함께 곱게 빻폭죽에 실어 밤하늘에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펑!"하고 터지는 듯한 통쾌한 웃음소리함께 밤하늘을 수놓을, 지나고 보니 썩 나쁘지 않은 듯한 그 잔해들을 보며 미소 짓고 싶다.


그렇게 바싹 마를 수 있을 그때까지.

하늘이든 마음이든, 화창해질 때까지.

어떤 빨래든 잠시 미뤄두자. 래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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