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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16. 2023

두고두고 꺼내 볼 마음

서랍 속에 고이 넣어 둔

마지막 기내식을 먹고 인천에 다다를 무렵, 창밖의 하늘은 잔뜩 흐린 먹구름이었다. 한국에는 한 주 내내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는데 아름다운 일출과의 조우도 잠시, 구름 아래로 내려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이러나저러나 4년 만의 여행을 무사히 끝마쳤다. 팬데믹이 있었다고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스크 한 번 쓴 적이 없었고 비행기에서 탑승과 동시에 승무원이 알코올이 묻은 소독티슈를 건넬 때마다, 여행지에선 작동은 하지만 소독액을 보충해 두지 않은 먼지 쌓인 손소독기와 마주할 때마다, '아- 여기도 팬데믹이 있긴 있었구나' 잠시 실감할 정도였다.



한 주간의 휴가를 내는 일이, 말로는 '내 연차 내가 쓰겠다는데 어때서!'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사무실에는 일찌감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의 업무 특성상 매주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 있는 탓에 사전에 고지하지 않으면 나로 인해 많은 이들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어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더군다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동안 누군가의 장기부재가 익숙지 않아져 버린 형국이라, 연수면 모를까 이렇게 일주일 간 여행을 떠난 이는 잘 없었어서 좀 더 큰 결단력을 내보여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존경하올 부서장님은 일찌감치 경험치를 늘리는 일을 권장하셨고 학교에서 근무하면 여름방학 외엔 편하게 쉴 수 있는 때가 없는데, 젊은 나이에 어떻게든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한다며 여행을 계획하기 전부터도 나의 휴가를 적극 지지해 주셨다.




떠나기 이틀 전, 그의 방에 결재를 받으러 들어갔다가 (이미 연차 신청서에 결재는 하셨지만) 한 번 더, "저 이틀 뒤에  떠납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그가, "아, 그렇지!" 하더니, "잠깐만-"하고는 갑자기 옷장을 향했다. 그러더니, 재킷 안쪽에 넣어둔 지갑에서 현금 10만 원을 꺼내 소봉투에 넣으시더니 곧바로 나에게 건넸다. 순간 깜짝 놀란 데다가 금액에 한 번 더 놀라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던 내게 그는, "더 주고 싶은데 부담스러워할까 봐 이것밖에 못 주는 거야. 가서 정말 아-무 생각하지 말고 좋은 거 많이 보고 재밌게 놀다 와!"하고 봉투를 손에 꼭 쥐어줬다.

그러곤 무심하게 책상 위에 올려둔 결재판에 결재를 하기 시작하셨는데, 나는 순간 먹먹해져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일주일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심지어 놀러 가는) 부하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휴가비를 챙겨주시다니. 회사에선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보이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이 순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안구에 집중됐다. 고마움에 울컥하는 일은 복에 겨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나를 달래며, 다시 한번 나의 여정을 응원했다.

그리곤 그의 방을 나와 다짐했다. 아, 나도 언젠가 운이 좋아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그리고 아끼는 후배가 개인적인 충전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면. 휴가비를 챙겨 줄 아는 상사가 되어야겠다고. 겪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던 이 감정. 그는 나에게 이미 좋은 상사였고, 그 순간은 상사를 넘어선 훌륭한 '어른'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건넬 때마다 울컥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태연한 척 그의 미담을 전파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분 같은 좋은 어른과 일하고 있는 내가 복이라고.



혹여 그 금액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감사해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걱정이긴 한데, 그가 준 봉투를 사실 나는 서랍에 고이 넣어뒀다. 여행에 보태지 않았다.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함부로 소비할 수 없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언제 쓸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그가 건넨 봉투를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서랍에서 꺼내보기로 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을 때마다, 그로부터 받은 고마운 마음이 온몸을 관통했던 그 순간을 상기시키고자.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좋은 어른이란 열 마디의 말보다 어떤 행동으로 인해 상대에게 가슴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란 걸.

봉투를 꼭 쥐어주던 그는 나에게, 다른 건 바라지 않을 테니 무사히 돌아오라고만 했다. 일단 무사히 돌아오는 건 성공했고, 그의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며 선물과 더불어 그곳에서 산 엽서에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기로 했다. 막상 누군가 여행지에서 사 온 선물을 받았을 때 미안하지만 고마움과 별개로 크게 기쁘지는 않았던 듯하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그곳에서의 경험을 선물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그래서 이번엔 가까운 이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엽서를 좀 여러 장 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곳에서 갖고 온 물건보다는, 그곳에서도 당신을 생각했다는 그 마음일 테니.




이번 주말은 다음 주 출근을 위해 풀리지 않는 여독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집에 콕 틀어박혀 쉴 예정. 아-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꼭 해야지. 성당에서의 미사.



나의 여행 첫 일정은 이전에 다른 글(《안녕한 여정 I 》)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앞으로의 무사여정을 바라는 그곳현지인들과의 '미사'다. 이번에도 역시나 미사를 하고 여행을 시작했고, 별 탈 없이 한 주가 지나 한국에 돌아와 새 주말을 맞았다. 나의 무사귀환과 그 여정을 응원해 준 이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뜻으로 피곤해도 미사는 가야 한다. 그리고 이번엔 감사하다는 기도와 더불어 한 가지 기도를 덧붙이려 한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감사한 마음을 누군가로부터 전달받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며('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어렵게 썼구먼),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한 번씩 열어보고 싶은, 서랍 속 고이 간직할 마음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다른 누군가 나로 인해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위안을 게 된다면 참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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