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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09. 2023

배롱나무를 닮은 여름

계절의 지향점

운동을 하러 공원에 가다 보면, 세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식물의 종류도 다채롭다는 것을 느낀다.


계절마다 때를 알고 피어나는 꽃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왜 엄마들이 나이가 들면서 꽃을 좋아하는지도 알 것 같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도 그저 때를 맞춰 기다리기만 하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게 해주는 배신하지 않는 마음. 인간에게서 받은 실망과 불신을 이 친구들에게서 치유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무실에서도 식집사로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얘네들에 물을 주는 도 일주일 중 중요한 과가 되었다. 특히나 전임자 분이 키우시던 난이 하나 있었는데, 난을 키우는 것은 난이도가 높은 탓에 초반에는 나도 골골, 새 주인을 잘못 만난 그 친구도 골골댔다. 계속 잎을 잘라내기만 했고, 그러다 보니 거의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친구가 살아나면 나도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피치 못해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번은 공을 들여보고 싶었다. 그렇게 매주 한 번은 배수가 잘 되는 곳에서 비를 맞히듯 물을 흠뻑 주고, 영양제까지 사서 틈틈이 뿌려줬다.


이윽고 여름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잎이 튼튼해지더니 얼마 전부터는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배신하지 않는 마음. 같이 골골댔던 친구가 새순을 막 틔우니, 나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새 순이 나기 시작한 난(동음이의어)


운동을 하던 공원에서도 봄에서 초여름까지 곁을 지나갈 때 주위를 살피게 될 만큼 은은항 향기를 내뿜는 나무가 있었다. 공원이라는 공간에 자리한 거대한 디퓨저 같은 느낌. 꽃의 모양을 보고 검색했더니, 그 이름이 '자귀나무'였다. 원래부터 그 향기가 유명해서 유명 브랜드에서 향수로도 출시을 정도.


자귀나무는 분홍색의 테슬 모양 꽃이 나무의 가지가지마다 활짝 피는데, 그 높이가 꽤나 높아서 멀리서 볼 때는 꽃나무라는 느낌을 못 느끼다가 아래를 지나면 그 향기로 인해 자연스레 위를 쳐다보게 만든다. 봄에도 향기가 진하게 났는데 여름에 들어선 지금도 지나갈 때마다 간간히 느껴질 정도니 아주 끈기 있고 대단한 친구다. 그렇게 한참을 피어있던 꽃이 최근에 색바래면서 동시에 날씨가 무더워졌다.

비로소 찾아온 진짜 여름.


자귀나무, 흐린 저녁에 찍어서 사진이 좀 을씨년스럽다


운동을 하는 공원의 양끝엔 수미상관의 느낌으로 똑같이 배롱나무가 있다. 배롱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내 잊고 있다가, 얼마 전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을 보고 알아차렸다.

그래, 배롱나무들이 여기 있었지.


열심히 걷다가 반환점을 돌 때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그때마다 배롱나무를 만난다. 밝은 낮에 봐도 예쁘고, 여름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빛나는 모습도 예쁘다. 그래서 작년 여름엔 핸드폰에 배롱나무 사진이 많았다. 내가 배롱나무를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그 꽃이 예쁜 것도 있겠지만, 가장 뜨거운 여름동안 그 꽃과 색을 아주 오래 유지하기 때문다. 나는 그 지구력을 존경하는 것이다. 작년에도 운동을 하면서 여름내 몇 주간, 몇 번을 봤는데도 그 색과 생기가 여전했다. 이리 더운 날씨에도 모습이 변함이 없다니, 어쩜.


공원에서 반환점을 돌며 1년 만에 다시 만난 배롱나무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 다시 너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그러곤 한참을 또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번 여름은 배롱나무처럼 사는 거야. 뜨겁고 뜨거워도 아주 오랫동안 나의 꽃을 드러내 보이며 살겠노라고. 자귀나무에게는 봄부터 초여름까지 오랫동안 은은하게 내뿜을 수 있는 향기가 있다면, 배롱나무에겐 뜨거운 여름을 오랫동안 버텨낼 수 있는 꽃이 있으니, 그 꽃처럼 이번 여름을 보내고 싶어졌다.


배롱나무 자태, 그 자체로 과속방지턱일 듯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비로소 7월, 하반기를 맞이했다. 시간의 속도에 놀라기도 하면서, 새 순을 틔운 사무실의 어린 난과 더불어 나도 무엇인가 새로운 내 모습을 틔울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 배롱나무를 닮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듯, (맥락에 어긋나는 뜬금없이야기일 테지만) 나는 지금 한국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와 있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이국에서의 휴가.



이 시간을 즐기되, 제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만날 여름을 어떻게 보낼지도 이곳에서 고민해야겠다. 공원의 배롱나무들 조금씩 꽃망울을 틔우고 있던데 여행을 다녀오면, 아마 꽃들은 더 풍성해지고 그 색은 더 선명해져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배롱나무를 닮기로 한 나의 여름도 한층 더 풍성하고 또렷해져 있기를. 그렇게 남은 여름도 꿋꿋이 그 색과 생기를 발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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