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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02. 2023

인생 첫 10주년

not best but steady

2013년 7월 1일.

만으로 스물셋. (이제 만 나이를 적용해야 하니, 만 나이 기준으로 가겠다.) 힘든 취준터널을 지고 있던 그해 여름, 나는 그렇게나 희망하던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입사 당시 증명사진을 보면, 왜 그렇게 촌스럽고 못생겼는지.


아직도 서랍 한 구석에, 당시 합격통보서를 보관하고 있다


2023년 7월 1일.

징그럽기 그지없는 입사 10주년을 맞았다. 나보다 훨씬 오래된 장기근속자 선배들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10년이 솔직히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욕을 하고 다녔으면서, 10년이나 이 직장을 다녔다니. 학교는 최대한으로 다녀도 6년이었는데, 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10년씩이나. 그러고 보니, 살면서 지금껏 '10주년'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입사하고 2년 정도 됐을 무렵, 나에게 큰 고비가 찾아왔다. 퇴사 욕구가 솟구치던 그때.

당시 나를 유난히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제 욕하기도 입 아프다.) 내가 왜 집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스트레스에 몸살 하며 살고 있는 걸까. 월급이 좀 적어도 집 근처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중 의 퇴사욕구 동조해 주는 이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또 취업준비할래?', '이직하면 그런 사람 없는 줄 아냐?', 조금만 더 버텨보라며 하나같이 말리는 사람들뿐이었다. 취업시장이 녹록지 않다는 것, 그 사람을 빼면 썩 나쁘지 않은 직장이란 것을 그들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제가 아니시잖아요. 맨날 그와 만나지 않으시잖아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택은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울 수 있는 슬픈 대나무숲이었고, 귀뚜라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자그마한 방에서 틈틈이 채용공고를 살폈다. 실제로 몇 군데는 지원하기도 했고. (떨어지긴 했지만.) 숨구멍인 주말 동안그곳에 있기 싫어서 무조건 금요일 저녁마다 대구로 내려왔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주말이었다. 갑자기 아빠가 빨래를 널자며, 옥상으로 좀 올라와보라고 했다. TV도 봐야 하고, 귀찮아 죽겠는데 왜 갑자기 올라오라고 하는 건지 구시렁대며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엔 낚시의자 2개 펼쳐져 있었고, 아빠가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다는 것이 직감되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K-장녀는 부모님의 걱정거리가 되선 안되니까.


아빠는 엄마를 통해 나의 험난한 직장생활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내가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어한다는 것도. 그러면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힘들고 싶으면 그만둬도 된다. 아빠 아직 너 먹여 살릴 능력 되니까, 힘들면 억지로 다니지 마."


아빠의 그 말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데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려 펑펑 아니,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거든.


정말 꼭 듣고 싶었던 말을, 그렇게 들었던 그 순간. 무언가 가슴속에 맺힌 게 쓱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심을 담은, 그만둬도 된다는 그 말을. 힘들면 놓아도 된다는 그 말을. 나는 정말로 듣고 싶었던 거구나- 그때 깨달았다. 한참을 울었다.



펑펑 울던 것을 겨우 추스르고, 알겠다며- 좀 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지. 저 응원에 힘입어 조금만 더 힘내서 다녀보자고. 위태위태한 주행이라 생각했거늘 갑자기 에어백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좀 더 달려보자고, 버텨보자고.


그날밤, 그와의 대화 이후 하나 가슴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차피 선택은 상대의 몫이니 이왕이면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인데 어차피 선택은 그 자의 몫이잖나. 그러니 이렇게도 힘든 순간이라면 상황적 판단보다는 가급적 그 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자. 어차피 그것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날, 아빠는 그만둬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은 내 몫이니까.

그렇게 어찌어찌 버텨, 꾸역꾸역 10년을 채웠다.


나를 힘들게 한 그는 현재 퇴직을 앞두고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와의 인연은 당시 내가 발령 나면서 종료됐지만, 같은 조직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뜨문뜨문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 사이 내가 연차가 쌓이고 승진도 해서 그런지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건지, 내가 더 큰(?) 사람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예전만큼 그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제 곧 안식년이 끝나면 그이 조직을 떠난다. 한창 그로 인해 힘들어했을 때엔 과연 저 사람과 이별할 날이 있을까 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코앞에 와 있다. (이제와 그에게 정말고마운 것은, 그를 겪고 나니 직장 내에서 소문난 빌런들이 에겐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고 가끔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맙소.)



아빠도 은퇴를 몇 년 남기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과연 그에게 '아빠, 이제 그만둬도 돼. 나 아빠 먹여 살릴 능력 되니까, 힘들면 억지로 다니지 마.'하고 말할 수 있는 딸일까. 참- 생각해 보면 꽤나 무거운 말인데 아빠는 나에게 그 말을 들려주었구나. 감사합니다.


엄마는 입사 10주년이라고 지난 주말에 옷을 한 벌 사 줬고, 동생은 계절에 맞는 가방을 선물해 줬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받아본 적 없는 개근상을 받은 기분. 졸업식날 가장 대단한 상이 개근상인데, 개근상도 고작 6년이거늘. 엄마는 고른 옷을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우리 딸이 이제 직장 생활한 지 10년 됐거든요."하고 언하던데, 그런 엄마가 귀여우면서도 이렇게나 다 큰 딸의 10주년을 기념해 주려는 그녀마음 황송했다.

모두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입사 10주년 리츄얼이 있다. 그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하기로 하고, 지난 10년간 나를 성장케 한 많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직장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내가 지금껏 버텨낼 수 있었다는 이다. 무거운 일날 힘들게 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기운들이 있었을지언정, 그것은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를 넘지 못했다.


징그러운 나의 직장생활이 언제까지 징그러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가 됐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했든 못했든 장생활 10년이나 한 걸 보니, 너 이제 너 한 사람 스스로 먹여 살릴 능력은 되는 것 같다고. 10년이나 버텼으면 이젠 그 시간이 가끔 에어백이 되어주지 않으려나.



글을 마무리하며 깨닫는다.

10년 동안 한 직장에서 버텨낸 걸 보니, 나도 꽤나 끈기 있고 징한 사람이었단 걸.

best는 아니었어도, steady는 인정.


아무쪼록 고생했어,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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