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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30. 2023

내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2023, Summer, Gdynia, Poland

모든 과거의 일이 '추억'이라는 근사한 라벨을 얻을 수는 없다. 의미가 있고 잔상이 커야지만, 언젠가 다시 재생될 수 있는 필름처럼 '추억'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얻는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선별작업이 머릿속에서 진행되는데, 언젠가 내 머릿속의 선별작업이 시원찮음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다.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일을 즐겨하지 않았던 20대 중반, 고3 때부터 주-욱 써오던 일기딱 그 시점의 것들만 일(日)기가 아닌 주(週)기인지 월(月)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특정 시점에 대한 기록들로만 남아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회사생활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라는 핑계였을 테다. 리고 남아있는 기록도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체로 슬럼프 시기. 일기를 쓴다는 건 그저 억지로라도 기운을 차리기 위한 의식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무렵 아르바이트로 경비를 대던 배낭여행에서 발전해, 직장인이 되어 번 돈으로 첫 여행을 떠났다. 지금도 그때 당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자주 쓰지도 않았던 가볍지도 않은 두꺼운 일기장을 캐리어에 굳이 넣어갔다. 고대하던 여행지였지만, 당시 일기를 자주 쓰지 않았던 탓에 그럴싸한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는데도.


하지만 이 무거운 것을 기왕 가지고 왔으니 뭐라도 쓰자 싶었고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잠들기 전, 그날 아침 눈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화를 시간 순으로 주-욱 적어냈다. 사실 피곤한 탓에 무엇을 강조해서 써야 하고, 무엇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지 구분할 기력이 없었던 것 같기도. 그러다 보니 감정이 들어간 문장보다는 사실 기반의 문장이 많았다. 어딜 갔고, 무얼 봤고 등 사소하게는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온 일, 점원이 한 이야기와 표정까지 묘사하기도 했다. 오늘 하루 호텔로 돌아오기 전까지 경위서를 쓰는 느낌이랄까.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다시 일상을 살아가느라 일기장을 자주 열지 않았고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일기를 쓰고 싶은 시점에만 일기를 썼다. 그렇게 다 1년이 지 새로운 여행을 앞두고, 우연히 1년 전의 여행기가 기록된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하루 일정이 거의 두 페이지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그러다 여행 중 버스를 탔을 때의 일화가 적혀있었는데, 당시 버스 밖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뒀기에 핸드폰 속 사진 통해 기억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찰나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때문에 가방을 쿵 하고 떨어뜨렸고, 옆 자리의 할아버지가 가방을 주우신 다음 나에게 웃으며 건네주었던 순간이었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일기를 펼쳐보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억해내지 못했을 찰나의 순간. 되살아난 추억에 묘한 쾌감이 들었던 그때, 나는 기억 추억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의외로 내가 광지서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순의 감동 못지않게, 사소하기 그지없는 찰나의 일화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결과적으로, 좋았던 모든 추억을 머리와 사진 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해 낼 수 있으리라는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 날 버스 안에서 바라 본 풍경


그 이후로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 일기장 한 두 페이지 정도 빼곡하게 그날의 일화를 모두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서 늦게서야 떠오르는 부분은 삼색볼펜의 파란색 펜으로 공백에 빠짐없이 덧붙여 적었다.


이번 여름여행에서도 그드니아(Gdynia)라는 소도시로 기차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귀여운 꼬마들을 잊지 않으려 그날밤 일기에 그들을 기록해 두었다.


기차 안, 맞은편 자리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돼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앉았다. 왼쪽은 안경을 쓴 똑소리 나는 이미지, 오른쪽은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 이미지였다.

둘 다 기차를 타고 가는 중에 의젓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핸드폰은 통화할 때만 꺼내고, 가방에 꼭 넣어두는 모습이 우리나라 아이들과는 달라서 좀 놀랐다.

둘이서 조곤조곤 대화를 하다가 정적이 흐르기도 했고, 목이 마르면 도중에 가방에서 콜라를 꺼내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들은 내가 팔에 선크림을 바르는 모습을 힐끔힐끔 보기도 했다. 같은 역에 내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쉽지만 안녕.


 욕심에 함부로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으니, 나는 그저 그들의 귀여운 모습을 기록했다. 긴 문장으로 써 내려간 내 나름, 언제고 되돌아볼 수 있는 추억으로의 라벨링이었다.


귀여운 꼬마들이 앉아 있던 자리


많은 사람들이 요즘엔 영상으로 기록을 남긴다. 안타깝게도 내 핸드폰엔 그만한 용량이 없을뿐더러, 그만한 시간을 재생시켜 볼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상엔 다른 건 잘 보여도, 당시의 내 감정이 보이지 않아서. 글을 읽으면 단순한 사실 전달이라도 어떻게 묘사했느냐에 따라 대상을 바라본 당시 나의 시선과 태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에겐 글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기록이다. 사진 한 장만 곁들이면 더 완벽해지지.


사실 '추억'의 라벨링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미래의 나의 몫이기에. 그때 많은 재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좋은 날이다' 싶은 날엔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기록해 둔다. 번거롭더라도.


누가 그러던데, 사람은 나이 들수록 지난 추억을 먹고 산다고. 미래의 내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난 그저 잔뜩 준비해 놓을 뿐이다. 골라 드세요.



주중에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복잡하던 차에, 휴가 중인 선배가 감사하게도 퇴근 무렵 근처로 갈 테니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그녀와 저녁을 먹는 동안 비가 쏟아졌는데, 저녁을 다 먹고 일어날 즈면서 더웠던 기운도 한 풀 꺾인 듯했다. 우리는 가게에서 나와 산책을 하러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는데, 평소 저녁산책으로 붐빌 법한 공원은 비가  탓에 조용했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나온 아저씨 한 사람이 전부였다.

그녀와 공원을 거닐면서, 발자국이 된 그녀의 과거와 그 발자국으로 그려지는 나의 미래를 논했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또래이자 한 조직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한껏 시원해진 공기에, 방의 창문을 모두 열어두고 환기를 했다. 살짝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방의 환기 같기도, 마음의 환기 같기도.




이 정도 재료면, 언젠가 이 날도 그럴싸하게 추억해 낼 수 있지 않으려나. 어떤 필터의 화면으로 구현해 낼지는 미래의 나에게 맡긴다. 돌이켜보니 유명한 에서의 짜릿한 감흥보다 이렇듯 가장 평범한 순간, 그 속에 자연스레 묻어있던 과거의 나를 발견했을 때, 그런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더욱 선물 같은 추억이 되곤 했다.


나는 늘 보통을, 사소함을, 평범함을 지향해 온 사람. 특별한 때야,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머릿속에 머무를 테니 쉽게 잊힐 보통의 순간을 자주 기록해야겠다. 무난했던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그들의 소중을. 불어 다행 지금을.


그중 어떤 것을 그럴싸한 '추억'으로 채택할지 훗날의 에게 맡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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