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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Aug 06. 2023

인간미 실격

잃어버린 인간미를 찾아서

아주 오래전 직장인 건강검진을 검진센터가 하나 있는데, 그곳로부터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영업전화가 온.  거의 이용하지 않은 데다가, 전화 자주 어오 탓에 제부턴가 그곳의 전화가 매우 귀찮게 느껴졌다. 화를 받지 않, 번호를 스팸처리 해도 자꾸 새로운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 그러다 얼마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통 왔발신자 정보를 알려주는 앱에서 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혹시 거래처 중 한 곳인가 싶어 전활 받았. 아보니, 역시 그 검진센터다.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안녕하세요? 저희는 00 건강검진센터입니다." 하는 안내멘트가 들렸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듯한 목소리 듯했다. '또 거기냐?' 하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 그 그 순간, 종료 버튼을 터치 동시에 "000 고객님 맞으-" 하고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 들렸. 알고 보니, 녹음된 목소리인 줄 알았던 그 음 사람의 목소리던 것이. '앗!'하고 순간 놀랐지만 어떡하겠나, 난 이미 끊어버린 것을.


업무적으로도 꽤나 영업전화를 받는 편인데, 혹할만한, 신박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영업직의 고충 느껴져 가급적 사이트 주소나 포트폴리오를 메일로 보내주면 보겠다 대답한다. 그러나 이번 건강검진 영업전화의 목소리는 거의 AI 음성과 가깝게 들려서 전혀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끊고 나서 조금 미안해졌다.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전화를 뚝하고 끊으면 기분 나쁠 테니. 그렇다고 검진받으러 가지 않을 건데, 다시 전화를 걸어서 '아깐 죄송했어요. 하시려던 얘기가 뭐죠?'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10년간 일하면서, 모든 민원 전화의 첫 멘트는 정성을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전에 오랫동안 맡았던 업무가 주로 민원인을 응대하고 상담을 해야 하는 업무이기에, 항상 첫 멘트를 내뱉으면서 과연 내가 지금부터 정성을 다할 수 있을지 의심럽곤 했다. 지금처럼 고객응대근로자 보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이어서 그런지, 무대뽀(?)의 민원인들 상당수 겪었기 때문에.


오랜 보험설계사 경력으로 똘똘 뭉쳤다는 빈틈없는 말빨의 학부모와 언쟁을 하면서 "내가 왜 당신 어머니야?"라는 막장드라마에 나올 법한 앙칼진 대사도 들어본 적이 있고, "누나, 그 학교 입학하면 누나랑 밥 먹을 수 있어요?" 하는 다소 불쾌한 상담전화도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그 모든 전화의 첫 멘트는 정성을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뭐- 피차 항상 만족하며 전화를 끊은 것은 아니, 성민원의 경우 최대한 후폭풍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다년간의 경험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와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란 걸 알기에, 최대한 영업전화가 오면 불쾌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려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AI에게는 굳이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는 사람인데. 언니, 조금만 더 인간적이셨더라면 제가 그렇게 끊진 않았을 텐데 너무 AI 셨어요.




매년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몇 가지 의무교육을 사이버로 실시한다. 올해도 역시나 고객만족도 향상을 위한 교육과정이 있었는데, 그중에 잘못된 높임말에 대해 알려주는 회차가 있었다. "0만 원 되시겠습니다.", "신상품이세요.", "디자인이 예쁘시고요."와 같은 과도한 높임말을 바로 잡아주는 내용이었다. 그나저나, 얼마나 고객만족을 중시해 왔으면 뭐든 높이지 못해 안달인 말들이 사용됐던 건지.


몇 달 전에 스마트폰이 고장 나 서비스센터에서 A/S를 받고 나왔는데 기사님으로부터 명함까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며칠 뒤 센터의 팀장이라는 사람이 휴대폰 번호로 문자를 보내왔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 말과 함께 고객만족도 조사가 오면 답변을 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세심하다 생각보다는 같은 직장인으로서 '와-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하는 안쓰러움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무난했던 고객 중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데,  잠재적인 불편러 중 한 사람가 싶은 생각에 괜스레 씁쓸했달까.



지난달 초에 떠난 해외여행에서, 외항사의 항공편을 이용했다. 장시간 운항하는 비행기의 이코노미석 뒤편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댄다. 잠시라도 서 있으려고, 스트레칭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언제쯤 나도 비즈니스를.) 그리고 그곳엔 생수와 일회용 컵을 비치해 두기에, 나도 가끔씩 가서 스트레칭을 하며 물을 마시곤 했다.


그러다 언제 한번 또 물을 마시러 뒤편으로 갔는데, 2L에 가까운 생수병이 이미 몇 병이나 동이 나 있었다. 그나마 물이 남아있는 생수병도 거의 바닥을 보이던 찰나, 마침 근처에서 쓰레기를 정리 중이던 스튜어드에게 물을 더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와우!! ('또 물이냐?'라는 표정으로) 이번 비행 편에는 승객들이 다들 목이 너무 마른가 봐요. 물이 놔두면 사라지네요!"하고 웃으면서 새 물병을 꺼내주는데 그의 인간적인 반응에 나도 실소가 터졌고, 웃으며 그가 건네는 새 생수병을 건네받았다. 아마 우리나라 승무원이었으면, "네, 바로 드리겠습니다!"하고 자동응답기처럼 답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고객에 대한 하고 딱딱한 높임을 걷어내고 격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 아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그만한 사연의 역사들이 있을 테니. 다만,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 조금은 인간적이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국민신문고'를 언급하며 일을 크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민원인도, 자동응답로봇과 대화하는 느낌의 직원님도 인간미가 없는 건 매한가지니까.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것도, 그 정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람 아닌가.


아, 인간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악성고객에게는 사실 자동응답기처럼 대화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비인간적인 것엔 비인간적인 응대가 답인데, 한편으론 비인간적인 사람이 많아져서 점점 서로를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전화보다는 톡, 문자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많아져서 전화를 어려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가다 학생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사리 걸게 된 이 전화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인 불만이 있는 듯한데 이야기를 들어주려 해도 분노조절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거나 본인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과의 인간적인 대화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니 자꾸만 행동으로,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식의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점점 모든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며, 더더욱 멀어지는 세상이다.



교직원 집체교육 중에 AI관련 강의가 있었는데, 수업 중에 강사가 말했다. AI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세상이니, 이제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보다 그 답을 가장 빨리 찾아낼 수 있는 '질문을 잘하는 사람'('프롬프터'라고 하던가)이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나는 그래도 질문을 잘하는 사람보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최상위 포식자로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질문을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면 좋겠다.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대해야만 하는 이 모순적인 세상 속에서.


단지 '인간적이다'는 말 그대로, 가장 오래 살아남아야 할 사람 '사람스러운, 사람다운 사람' 바라는 건데.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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