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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Aug 13. 2023

말을 아끼기로 했습니다

아니, 미루기로 했습니다

전공이 전공이었던지라, 대학생 때 봉사활동은 수업을 듣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의무적이고 자연스러운 대외활동이었다. 3학년을 앞두고 있던 겨울방학 무렵, 나는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취약계층 아동 대상 대학생 멘토링을 신청했었고,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내가 맡은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 슬기(가명)와, 4학년 남자아이 지훈이(가명). 슬기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반면, 지훈이는 떠들썩한 개구쟁이였다. 한 학기에 한 명씩 진행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기간 동안 나는 아이들과 매주 한두 시간씩 방과 후 교실에서 만나 공부도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슬기는 부모님 대신에 할머니와 살고 있는 여리고 작은 여자아이였는데, 옷 조금 촌스러웠던 데다가 몽실언니 느낌의 똑 단발을 하고 있었기에 봐도 엄마보다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걸 수 있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고, 대화가 쉽지 않았다. 내가 묻는 말에, 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스무고개처럼 질문을 건네다 슬기가 할머니와 함께 KBS1 채널에서 저녁 8시 반쯤 방영는 일일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슬기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사실 재밌기도 했다.) 멘토링을 가는 날마다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쌤은 그 장면에서 너무 화가 나더라, 웃기더라.' 과장된 표정으로 얘기를 하면, 슬기는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나는 슬기와 친해질 수 있었다.

지훈이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자세히 보면 똑똑한데, 열심히는 하지 않는 아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지훈이는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살고 있었는데 아빠는 멀리서 일하시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셨고 실질적인 양육자는 삼촌과 할머니였다. 지훈이는 나를 편하게 대했고, 나를 마치 사촌누나처럼 여기는 듯했다. 장난치는 걸 좋아해서, 공부를 하자하면 바닥에 드러눕거나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다 분위기를 잡고 공부를 시작하면, 가끔 어려운 수학 문제도 곧잘 풀어내곤 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정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훈이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는데 지훈이가 말했다. "쌤, 저 집에 돈도 없는데 쌤처럼 대학이나 갈 수 있겠어요? 아마 어디서 몸 쓰는 일이나 하고 있겠죠."


사실 순화해서 쓴 거지, 실제로 지훈이가 한 말은 더욱 험하고 암울했다. 내가 들어본 초등학생의 장래희망 중 가장 충격적인 답이었다. 나는 지훈이에 조금이라도 균열 생기길 바랐다.




멘토링이 다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슬기는 내가 교실에 들어갔을 때 책상 앞에 앉아있지 않았다. 알고 보니, 슬기는 책상 밑에 숨어있었고 나도 똑같이 책상 밑에 들어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찾았다!"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슬기는 여태껏 본 적 없던 얼굴로 환하게 웃었고 그날, 항상 모기소리로 겨우 대답만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이거(멘토링) 계속하면 안 돼요?" 하고 가장 긴 문장을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훈이는 마지막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았고 종종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자주 하는, 말 따라 하기로 나에게 장난을 걸어왔다.

"이제, 공부하자!"
"헤헤- 이제, 공부하자!"
"니 계속 내 말 따라 할 거가?"
"니 계속 내 말 따라 할 거가? 우히히-"


한참을 낄낄거리며 내 말을 따라 했는데, 그러다 문득 지훈이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무슨 말이든 내가 하는 말, 다 따라 할 거제?"
"무슨 말이든 내가 하는 말, 다 따라 할 거제?"

"아- 난 진짜 너무 똑똑하고 잘 생긴 것 같애."
"어..... 윽.... 아, 그런 말은!"

"아- 진짜 나 왜 이렇게 잘 생기고 머리도 좋지? 나중에 크면 얼마나 잘났을지 궁금하네?"
"아악... 윽.... 그만....!"


괴롭다는 말과 달리 아이는 웃고 있었다. 나는 지훈이가 말 따라 하기 장난을 걸 때마다 똑같이 역공했고, 언젠가 한 번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말을 따라 하며 부끄러워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지훈이는 '자세히 보면 똑똑한데, 열심히는 하지 않는 아이'에서 '언뜻 봐도 똑똑한데, 덜 열심히 하는 아이'로 바뀌어갔다.



문득 이 아이들이 떠오른 까닭은 그만큼의 시간 동안 나는 더 어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일도, 알맞은 방법으로 상대를 도와주려 하는 일도 점점 어설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때가 더 영리했다.


오래된 맏딸과 고인 물이 된 과장, 언니 같은 친구로 살고 있는 나에게 제각각의 고민을 갖고 있는 이들의 사연이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고질적이거나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거리들이 펼쳐지는데, 단순하지 않은 어른아이들의 이야기 앞에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과연 나는 슬기의 환심을 사려고 일일드라마 챙겨보던 때처럼, 지훈이의 심연에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자신의 입으로 내뱉게 해 주었던 때처럼, 그럴만한 혜안을 지금도 갖고 있는 걸까.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당시의 방법 중 그나마 지금 내가 차용할 수 있는 방법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나는 나이만 어른이었던 나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아이들을 변화시킬 힘이 나에게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두 아이 모두 친해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해 줬다. 드라마라는 열쇠는 슬기가 쥐어줬고, 말 따라 하기 기법은 지훈이가 알려줬다. 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만의 해결책이 발휘될 때를 기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처럼 지금 누군가의 고민에 아무 말이나 건네지 않으려 말을 아끼기로, 아니 미뤄보려 한다. 할머니의 간병에 지쳐가는 엄마에게 가장 적절한 위로의 말이 떠오를 때, 나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앞두고 걱정하고 있는 친구에게 더 은 응원의 말을 건넬 수 있 때를. 


시간의 힘에 기대 책임을 그와 나겠다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숙한 건 매한가지고, 나는 그때의 나를 닮고 싶을 뿐이. 그리고 자원이 고갈됐을 때는, 저절로 자원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 답이니.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때까지는 그저 밥을 사주겠다, 마주 앉아 수저를 놔주 상대의 빈 속부터 채워줘 볼까 싶다. 가끔은 내담자께서 스스로 답을 찾게 되어 그 과정을 나와 나누는 날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어보면서.



여담으로, 아이들은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슬기의 MBTI가 혹시 지금은 E로 시작하지는 않을까. 금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을 지훈이가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사기캐의 대학생으로 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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