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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08. 2023

안부를 묻지 말아 주세요

중견후배의 고충

대학생 시절, 나의 주 수입원은 과외였다. 대단히 실력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어머님들은 나의 언니, 누나 같은 넉살을 좋아하셨다. 심지어 어떤 어머니과외라는 말로 포장된 멘토링의 느낌으로 나에게 아들을 맡기기다. 소문에 소문으로 하나 둘 늘어갔던 나의 어린 학생들은 휴학생 시절, 많을 때는 한 번에 6명까지도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신입 때 받은 월급보다 그때 더 벌었다.)


매일 밤, 목소리가 갈라지고 애쓰지 않아도 절로 다이어트가 됐다. 힘들지 않다고 할 순 없었겠지만, 덕분에 나는 어린 친구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쉽게 터득했다. (그래서 지금도 어린 학생들과 대화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이돌에 빠져있는 여학생들을 위해 매주 주말마다 음악프로를 시청하고, 축구에 미쳐있던 남학생 때문에 유럽 축구리그 공부도 했었다. 수업 시작 전에 그네들의 관심사 이야기를 꺼내면, 수줍음 많던 애들은 어디로 가고 어렵지 않게 아이스브레이킹이 가능했다. 눈높이 교육보다 눈높이 취향으로 다가갔던 나의 방침(?)이 먹혔는지, 한 아파트 한 라인에서만 4명의 애들을 맡았던 것 같기도.




어린 사람들하고 친해지는 방법은 OK, 터득.

그러다 어린 나이에 입사하게 된 직장생활은 엄마, 아빠, 이모, 삼촌뻘로 가득했고 이제는 어른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학생의 부모님을 또 내가 열심히 면담해 봤으니. 그때의 화법과 넉살을 선배들에게 선보이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렇다고 두 손 싹싹 비비는 아첨의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주어진 일 앞에서 일을 잘하지는 못할지언정 책임회피란 없었다. 잘하기보다 열심인 후배로서의 모습부터 보여드리려 했고, 틈틈이 앓는 소리를 하며 솔직하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힘들다고 혼자 숨기고 앓는 성격이 못 되는 지라, 힘들 땐 그들이 알고 있는 해답 중 하나라도 얻으려 했기에.


아주 가끔은 대변인도 자처했다. 차마 어린 후배 앞에서 윗사람의 욕을 내뱉지 못하고 끙끙 는 선배들 앞에서 시원하게 윗사람의 욕을 내질러 드렸달까. (의외로 선배들은 내가 불합리한 윗사람의 욕을 대신해 드리면 좋아하셨다. 손을 내저으며 말로는 그러지 말라 하셨지만, 입은 웃고 .)



차라리 신입 때가 이런저런 방법을 써가며 철딱서니 없이 어른들께 들이대기 편했던 것도 같다. 이제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요즘, 이제와 나는 어떤 후배가 되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게 된 어느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요즘 어때?"


막 그렇게 친하지도, 그렇다고 막 어렵지도 않은 선배의 질문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길을 잃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시는데, 그의 앞에서 나는 '아, 저 요즘 힘듭니다. 왜냐면요-'하고 다소 고된 직장으로서 후배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지, '아-무 문제없습니다! 평온합니다!'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사람을 찾아내 같이 욕하게 될까 봐 두려웠고, 괜찮다고 하자니 더 이상의 말문을 닫아버리는 것 같아서 선배를 뻘쭘하게 만드는 것도 같았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신중을 기해 그와 대화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왔다. 분명 선배는 나를 위해서 질문을 건넨 것이었을 텐데, 난 왜 그의 질문에 답하는 일이 이리도 힘든 것인가.


선배와의 대화에서 거의 마지막엔 도망치다시피 나와버렸다. 그저 나를 위해서 말을 건넨 선배의 취지와 달리, 나는 그에게 내 상황을 잘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반대로 같은 질문에 후배들로부터 어떤 답을 받아왔던가.




'힘들다' 앓는 소리를 내는 후배는 격 없고 편한 만큼 그의 고충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내 위치가 아쉬웠고, '괜찮다' 씩씩함으로 무장한 후배는 빈틈이 없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과의 대화가 편안하지 못했기에, 선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길을 잃었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엄살과 솔직함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아 후배'답게'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제는 어려워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바꿔 말하면, 내가 선배로서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 버거워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할 자신이 없다는 건, 들을 자신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다시 과외쌤 시절로 돌아가 비유하자면, 세대와의 대화가 편하기 이전에 린 세대와유대관계부터 좋아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이돌이나 유럽 축구리그를 공부할 정도의 성의까진 아니더라도, 그동안 조금 의지가 없긴 했다. 솔직히 귀찮기도 했고. 물론 그들이 나와의 대화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은 어떨 땐 속으로 귀찮다 느낄 만큼 내 눈높이에 맞추려 했고, 나를 챙겨줬다. 오늘은 네가 먹고 싶은 메뉴로 먹자며 굳이 번거롭게 밥을 먹으러 나가자 했던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 건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였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인사치레처럼 미뤄뒀던, '밥 한 끼 하자'를 실천할 때인가. 조금 어려우니까(?) 결이 비슷한 친구들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다. 엄살과 솔직함 사이, 씩씩한 장군과 비실리는 종이인형 사이에서 어느 지점이 무난한지 직접 겪고 배워야겠다. 들이 불편해하지 않고, 응해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들의 이야기에 안타까움이든 뻘쭘함이든 어떤 애매한 감정이 밀려와도 일단 견뎌보는 걸로.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그런가.

흠- 지갑을 열 때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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