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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15. 2023

금고에 볕을 쬐이는 일

빛과 바람을 들이는 일

사무실의 내 자리 오른 켠에는 아주 오래되고 커-어다란 금고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업무와 관련된 통장이 수십 개가 들어있다.  귀퉁이가 잘리고 마그네틱을 뜯어 기간만료 다 쓴 통장이어도 함부로 폐기할 수는 없.

난 통장들과 별개로, 재 사용 중인 통장들 아주 가끔 감사 등을 앞두고 그제야 밀린 통장정리를 하는데 사실 인터넷 뱅킹이 상용화 돼있다 보니, 통장이 필요한 일은 드물다. 고로 여러 가금고 문을 열 일이 잦진 않다.


그래도 아주 가끔 통장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몇 달 전부터 뭐가 문제였는지 이놈의 금고의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경고음만 들릴 뿐, 희한하게도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 대 급하지 않은 것이라 며칠 있다가 다시 도전하면, 그땐 또 금고가 열리곤 했다. 시간이 지나 재시도하면 열 수 있다는 생각에, 통장이 필요할 때엔 며칠간 간격을 두고 금고를 열곤 했다. 근본적인 해결을 계속 미룬 채로.


그러다 드디어 이번 주, 업무상 다른 직원에게 통장을 건네야 할 일이 생겼다. 혹시나 바로 문이 열리지 않을까 요행을 바랐는데, 역시나 그날의 금고도 여전히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날의 금고는 요상한 경고음을 계속 내는 것이, 느낌상 며칠 뒤에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 이젠 더 이상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전임자 분께 전화를 드렸다. 분명 한 번은 금고의 개폐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오래된 금고라, 번호로 여는 것 말고는 사실상 금고 업체가 와도 손쓸 방법이 잘 없을 거란 이야기였다. 무조건 일단 열어두고 연 상태로 어찌할지를 결정해야 할 거라 하셨다. 아, 그럼 저걸 어쩐담. 도끼로 부숴야 하나.


그러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갑자기 "아!" 하며, 비밀번호 입력 패드 쪽에 건전지가 다 되었을 수 있다는 정보를 건넸다. 도전해 보겠다고 부리나케 전화를 끊은 뒤, 금고 앞에 다가가 식은땀을 흘리며 터치패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리 밀고 저리 밀다 짧은 경고음과 함께 패드가 열렸고 건전지 4개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건전지를 빼고 새 건전지를 갈아 끼웠다. 이상한 경보음이 한참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고 나서 떨리는 마음으로 손가락 하나라도 다른 번호를 누를까 조심스레 번호를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그러자 띠로릭 하는 익숙한 사운드와 함께 "철컥!", 금고가 열렸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해결방안에 당황했지만, 이렇게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걸 여태껏 미뤄왔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며칠 뒤에 열면 열린다는 생각으로 지내려 했던 건지. 옛날옛적, 낡은 TV를 툭툭 쳐가며 좀 있으면 잘 나올 거라 기계를 달래던 시절도 아니고.




몇 년 전에 핸드폰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새로 산 용량이 큰 SD카드를 장착했었다. 그리곤 지난 여행 사진들을 다 복사해 넣어둔 뒤, 이후에 새로 찍은 사진들도 폴더를 만들어 SD카드에 저장했는데 카드 인식이 언젠가부터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을 제대로 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드를 뺏다 넣으면, 다시금 되곤 했으니까.


그러다 얼마 후 방심한 사이, SD카드 망가져 버렸고 그간의 사진은 다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여행사진들은 노트북에 백업을 해둬서 괜찮았지만 그 이후에 찍어 폴더를 만들어 놓은 사진들은 기억할 겨를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나름 복한답시고, 다른 이들과 주고받은 톡방에서 의미 있는 사진들을 다시 다운로드하곤 했지만 그마저도 일부는 기간이 만료돼 다운로드하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이러니하게도 사진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일이 오히려 귀찮아져 버렸다. 이렇게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거, 언젠가 모아놨다 한 번에 정리해야지 하고 미뤄둔 거지. 그러다 보니, 지난 여름휴가 여행사진은 아직 폴더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 이렇게 미뤄서 될 일인가. 언젠가 진짜로 손쓸 방법이 없을 수도 있거늘.


소중하기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창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이 귀차니즘이란.



언젠가 지금의 이 글들이 그런 금고 속 통장처럼 느껴질 때가 올 것을 안다. 열어봐도 그만, 안 열리면 다음에 다시 열어보면 그만. 사실 금고 속에 넣어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텐데도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으니 그리 여기는 것이다.


'기록의 금고'를 관리하는 일이란, 지난 것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거나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매일 한 주에 한 번씩 글을 쓰고 열어 넣어두는 일이지 않을까. 그 김에 여전히 잘들 보관돼 있는지 확인하고. 그러면 그 시간분의 가치가 더해져 더 소중히 여겨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들로 가득한 핸드폰 사진도 다음 주엔 무조건 정리해야겠다 싶다.)




가끔 쓸만한 재료가 없을 때엔 홀로 고민한다. 이번주는 그냥 넘어갈까 하고. 지금은 여닫는 일이 노력으로 자연스럽지만 언젠가 귀찮음으로 인해 글을 쓰는 일을, 이렇게 금고에 넣어두는 일을 귀찮아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언젠가, 어느 순간엔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나를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 지금부터 정성스레 그 경계를, 창구를 관리하려 한다. 미루지 않고 꾸준히 여닫 것을. 배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든 보충해 주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돌보면서. 고에 볕을 들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말 그대로 금고(金庫)란,

금 같은 것들을 모아둔 곳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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