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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22. 2023

언젠가 오늘이 재생됩니다

순간의 수집

몇 년 전, 딱 지금 같은 날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친한 과장님들과 각자 조퇴와 유연근무제를 이용하여, 저녁에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를 떠난 적이 있다. 어스름한 저녁, 노을이 지는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마침내 드라이브를 즐겼다. 나는 뒷 좌석에 앉아 있었고, 과장님 두 분이서 앞에 앉아 계셨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우리는 상쾌한 밤공기를 맘껏 들이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지.

"언젠가 오늘이 생각날 것 같아요."


나의 말에 과장님들도, "그러게-"하고 맞장구를 쳐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힘을 아직까지 느끼고 있다. 말이란 때론 주문처럼 새겨져, 정확한 문장의 형태는 흐려져도 그때의 기분과 마음만은 잊히지 않게 한다. 그래서 나는 유난히 좋은 날, 누가 듣든지 말든지 혼자 조용히 내뱉는다. 언젠가 오늘이 생각날 것 같다고. 기분 좋게 떠올릴 날들이 많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나는 산의 밤공기와 나의 그 문장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언젠가 오늘이 생각날 것 같다"는 그 말로 그 '순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엔 친한 후배들과 함께, 혼자서는 절대 가보려 하지 않았을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을 다녀왔다.



여름서부터 계획된 가을 산행이었다. 그나저나 등산의 '등'자만 들어도 숨이 가빠오는 나 같은 사람이 그 먼 곳까지, 그 험한(초보자인 나에겐 다소 험했다) 길을 이들과 함께가 아니었더라면 가볼 일이 있었을까. 오르는 길에 숨이 차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함께 쉬어주고, 무거울 텐데도 불구하고 과일과 라면, 보온병 안에 따뜻한 물까지 바리바리 싸 온 그녀들 덕분에 정상에서 잊지 못할 휴식도 맛봤다. 더군다나 정상에서 최고조로 발휘된 그녀들의 유쾌함은 다른 등산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고구마와 삶은 계란까지 얻어냈을 정도.


산 정상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본 것은 살며 처음이었다. 무슨 복이 있어 내가 이들과 이런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말 그대로 복에 겹다 못해, 복에 치다.


정상에서 홀로 내뱉었다. 언젠가 이 순간이 생각날 것 같다고. 말로 내뱉었으니, 언젠가 이들과 함께 본 억새의 장관이 내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갈 것이다. 일단은 언젠가까지 갈 여유 없이, 당분간은 내내.


귀여운 그녀들의 뒷모습


친애하는 나의 글동지, '진'으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바다를 사랑하 그녀는 지금 태평양의 한가운데로 떠나 있다. "좋다, 행복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글을 좀 더 잘 쓰는 사람이었다면 좋았겠다"라는 그녀의 글에는 하와이의 황홀함이 녹아 있었다.


작은 천국에서 편지를 건넨다는 그녀의 글과 함께 도착한 벅찬 순간이 수집된 사진들을 보며,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마지막 글 모임에서 그녀가 건넨 사진과 문장


어디든 자연스러운 곳에 자연스레 새겨지는 순간들이, 사람을 게 한다. 볕의 따사로움, 물가의 윤슬, 유영하는 구름.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특별함을 맛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장면, 예상한 대로의 풍경일지라도 그 순간에 존재하는 동안 새겨진, 찰나의 황홀경이 영영 잊히지 않고 모두의 기억에 자리남아 앞으로를 살아가는 데에 그 힘을 보탤 것이다.


아끼는 모든 이들이 빛나는 순간의 조각들을 고이 모아 각자의 자산을 불려 나가기를 바란다.


자연만큼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찬란함의 원천은 없다. 우쭐하고 득의만만한 우리 인간들이 이처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연히 여기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만큼 훌륭한 위안은 없다.

- 프랭크 브루니, '상실의 기쁨'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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