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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01. 2023

'보고 싶다'는 말

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8월 한 달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 꽤나 힘겨운 시간이었다. 퇴원 후 기력을 좀처럼 되찾지 못하던 외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n번째 간호하고 있던 엄마. 이대로는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의 몸도 마음도 부서질 지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한참이나 이어졌던 긴 장고 끝에 결국 할머니 요양원 입소가 결정 났다.


할머니가 입소하시기로 한 요양원은 학교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입소 시간에 맞춰 나도 잠시 외출을 달고 나와 인사를 드리러 갔다. 몸도 정신도 온전치 않았던 당시의 할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우리의 걱정과 달리 할머니는 상당히 회복된 상태로 면회를 간 엄마와 마주했다. 다행히 시설의 선생님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셨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꽤나 예쁨을 받는 입소자인 듯 보였다. 엄마는 할머니와의 면회시간 중에 할머니의 사진을 찍어오기로 했었다. '애들이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니, 웃어보라'며 핸드폰을 들이민 엄마에게, 할머니는 늙어버린 자신을 보고 싶다 한 손녀들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내 웃어 보이셨고, 우리는 덕분에 그녀의 웃는 얼굴을 사진으로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다 늙어빠졌는데, 내 뭐 보고 싶다고. 고맙구로."
애정 어린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싶다 말한 것은, 사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고마운 것이었다.



미혼으로 30대 중반을 맞이하고 있다 보니, 언젠가부터 기혼의 친구들과 점점 거리가 생기는 게 느껴진다. 서로의 세계를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기가 힘들어진다. 물론 한 가정을 책임지고 육아까지 병행하는 일이, 직장생활만 10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나에 비하면 훨씬 힘든 일이란 것을 잘 안다.

몇 주 전이었다. 퇴근 후 지친 기색으로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는데 기혼인 친구로부터 톡이 왔다. 아이를 키우며 걱정과 궁금한 점이 많았던 친구였는데, 자신이 궁금한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나의 다른 친구에게 그것을 대신 물어봐 줄 수 없냐는 내용의 톡이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 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퇴근은 했냐', '저녁은 먹었냐' 인사치레 하나 없이 딱 본인이 알고자 하는 질문만 한 마디 던져놓는 친구에게 괜 서운함이 밀려온 것이다. 가깝게 살지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가버린 그녀의 무성의함이 못내 서운했던 것이지.

친구에겐 자신 직면한 엄마로서의 세계가 먼저였던 만큼, 나도 피로한 직장인으로서의 내 세계가 먼저였으리라. 고분고분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마음은 톡에서 알게 모르게 드러났고, 짐작컨대 당시 나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친구도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가뜩이나 육아 때문에 힘든데, 그 별 것 아닌 거 하나 대신 물어봐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대단한 벼슬인 양 느꼈을 법도.

그날 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우리는 이제 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걸 또 한 번 느꼈다. 친구의 의미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며칠 전, 대학동기이자 타지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친구의 생일이었다. 1년에 고작 한 두 번 정도 만났던 그녀지만, 틈틈이 연락을 계속 주고받고 있었고 더군다나 생일이니만큼 기프티콘과 함께 인사말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말미엔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덧붙였다. 보고 싶다고.

톡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톡을 확인한 친구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곧바로, "지금 화 가능한 거야?"라고 물었고, 그렇다 말했더니 잠시 끊고 자기가 다시 바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친구는 끊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영상통화였다. 반가운 그녀의 얼굴이 화면에 뜨자마자, 내 얼굴에 절로 함박미소가 지어졌다.

한참을 대화를 주고받다, 친구가 "근데 나 살 많이 쪘지?"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조금 통통해진 모습인 것 같았다. 보통 살이 쪘다 싶으면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친구는 나의 보고 싶다는 한 마디에 얼굴을 보여주겠다고 영상통화를 건 듯했다.

통화가 끝나고, 너무 많이 웃은 탓에 얼굴 근육이 땅겨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고마운 마음에 뭉클해졌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바로 얼굴을 보여주다니.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도, 이렇게 간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해도 친구는 친구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친구 오랜만의 연락에 그간의 안부가 궁금하고, 더불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추석 당일, 미리 신청해 둔 면회시간에 맞춰 할머니를 뵈러 갔다. 보고 싶은 이에게, 그리고 보고플 이에게 서로 얼굴을 비추러.

'보고 싶다.'
흔한 애정표현의 하나라 생각했던 그 말의 무게를, 울림을 몸소 느낀 9월.

흔해 빠진 말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친애하는 서로에게 보고픈 이가 되었으면.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며, 보고픈 만큼 얼굴을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다.




비로소, 가을스러운 날씨다.

그래서인지, 보고 싶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차마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보고픈 얼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울을 본다. 더 보고픈 얼굴이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이 웃보기로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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