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게 베푸는 친절
때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년 전, 배낭여행으로 런던에 갔을 때였다. 3주 하고도 며칠 더 되는 여행의 첫 번째 도시였다. 2주 정도 혼자 여행하고 있으면 기말고사를 끝낸 동생이 따라 들어올 거라고 했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이미 취업이 결정 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름방학 때 두어 달 정도 인턴으로 일하고 나면 채용이 결정 나는 채용형 인턴제도가 유행하던 때였다. 인턴을 뽑을 때 정규직 채용과 동일한 서류와 면접 전형을 거치는, 마치 대학교의 수시전형 같은 느낌이었다. 인턴으로 근무할 때 지각을 한다거나 대단한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에는 99%의 확률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었으니 인턴 전형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나는 운 좋게도 어느 대기업의 인턴전형에 합격해 인턴 근무를 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과에서 1등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2학기 내내 취업을 준비하는 선배들의 시기 어린 눈총(?)을 받으며 출석일수만 채우면서 샌드위치 가게, 패밀리 레스토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과외 이외의 다른 아르바이트를 꼭 해보고 싶었기도 하고 입사하기 전 필수 코스 같은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서였다.
혼자 가는 첫 장기여행이었다(물론 절반이 지난 후엔 동생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는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캐리어는 절대 끌지 않겠다며 등산용품 전문매장에 가 내 앉은키보다 1.5배는 커 보이는 배낭을 샀다(나중에 이것 때문에 무릎에 탈이 났다). 그리고 블로그 여행 후기를 열심히 연구하며 일정을 짜고 숙소를 예약했다. 런던 in 로마 out. 전형적인 서유럽 여행 일정이었다.
그렇게 떠난 첫 유럽 여행은 시작부터 탈이 났다. 부산에서 인천, 인천에서 뮌헨, 뮌헨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5시 25분에 뮌헨에 도착했어야 할 비행기가 6시에 도착한 것. 그런데 런던발 비행기의 보딩 타임은 5시 50분이었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야만 했다. 게이트는 닫혀있었지만 비행기는 우릴(나 같은 처지가 한 명 더 있었다) 기다려주었고 다행히 비행기는 탈 수 있었으나 잔뜩 설레서 내린 히드로 공항에서 나는 인천에서 수화물이 따라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런던발 비행기가 나는 기다려주었지만 내 화물은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다. 어찌 저찌 카운터에 도착해서 물어보니 내 배낭은 다음 비행기를 타고 올 거라고 했다. 무려 두 시간 뒤에 도착하는! 그래도 며칠 뒤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짐을 기다렸다가, 열두 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훌쩍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겁도 없다 싶지만 그때 나는 런던에서 묵을 숙소로 혼성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제일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 없는 학생이었고, 무려 5개 나라, 8개 도시를 다닐 예정이었고, 영국이 첫 번째 나라였고, 런던은 물가가 제일 비쌌다. 그러니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위치는 좋았지만 내부는 숙소 예약 홈페이지의 사진과 다르게 습하고, 어둡고, 왠지 모르게 축축한 듯한 침구는 분명 새것을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찝찝했다. 나는 방 안 가득한 2층 침대 중 하나를 골라 2층에 자리를 잡고 험난했던 하루를 뒤로 하며 잠이 들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인터넷에서 본 영국의 앤틱 마켓에 푹 빠져있던 나는 런던의 모든 재래시장을 다 가보겠다는 일명 아래 날이 밝자마자 부지런히 다니기 시작했다. 예쁜 앤틱 제품들을 득템 할 수 있다는 캠든 마켓에 가기 위해 지저분하지만 감성 넘치는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캠든 타운 역에서 내려 기분 좋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꽈당. 나는 아주 제대로 넘어졌다. 발 밑에 턱이 있었는데 못 보고 걸린 것 같았다. 날이 추웠던지라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고, 목에는 새로 산 DSLR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다행히 카메라는 깨지지 않았지만 내 체중이 그 위로 엎어지며 굉장한 충격이 가해졌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나도 손으로 방어하지 못해 하늘에 잠시 떠서 몸을 내던지는 모양으로 땅에 처박혔다. 뇌가 흔들린 듯 시야가 엉망으로 흔들리고, 순간 여기가 어딘지 인지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편견이 무색하게 조그만 동양인 여자애가 불쌍해 보였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치지 않았는지,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고는 다들 제 갈 길을 다시 떠났는데 그중 한 할머니가 끝까지 남아 내 무릎이며 까진 손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선 말씀하셨다. "You want coffee?" 네? 남자였다면 줄행랑을 쳤겠지만 왠지 악의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였고, 나는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채로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따라 걸었다. 할머니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고운 할머니였다. 얼굴에 온통 주름이 자글자글한 와중에도 할머니의 두 눈만은 푸르게 반짝였다. 예쁜 모자와 코트, 장갑까지 차려입고서 어딜 가시는 길일까.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나에게 쓰셔도 되나? 이대로 나쁜 사람들에게 데려다주는 건 아니겠지. 끝없는 의심 끝에 우린 한 카페에 도착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카페라고, 여기는 핫초코가 맛있다고 추천하시기에 보통 때 같으면 절대 사 먹지 않았을 핫초코를 주문했다. 이걸 내가 계산해야 하겠지? 나는 의심이 가시지 않은 채 할머니를 쳐다봤지만 할머니는 내 시선은 보셨는지 못 보셨는지, 카운터 위에 있던 산타 모양 초콜릿도 하나 들어 같이 계산을 하시고선 나에게 선물이라고 하셨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할까 싶었는데 걱정할 필요도 없이 할머니는 굉장한 수다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학연수를 다녀온 지 고작 1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할머니의 영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 사실에 자괴감마저 느껴졌다. 아주 심한 영국 악센트에(아무리 생각해도 표준어는 아닌 것 같은데) 말도 굉장히 빠르고 많으셨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셨을까. 난 아직도 궁금하다. 알아듣고, 제대로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와다다 쏟아지는 그 말들 중 익숙한 단어를 찾으려 애쓰다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한참 얘기가 쏟아진 후에 할머니는 마켓 투어를 해주시겠다며 나를 이끌었지만 나는 혼자 여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길에 못내 서운하셨는지 세 번이나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셨고 나는 그때마다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경험 덕에 따뜻해진 마음으로 런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진 채 런던 일정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나는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중에 또 다른 친절을 베풀어준 이도 있었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할머니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국적도 인종도 다른 이방인에게 선뜻 시간과 호의를 베풀어준 할머니에겐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수없이 쏟아낸 그 말들은 다 무슨 말이었을까. 나는 편지하겠다며 주소를 받아 적어왔지만 날려쓴 알파벳조차 알아보지 못해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너무 슬픈 일이다). 나이 든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곱게 차려입고 있었지만 아마 딱히 갈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간을 기꺼이 함께 보낼 상대,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또렷이 기억나는 따뜻하고 고마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요즘은-세상은 따뜻한 곳이에요, 살 만한 곳이에요… 이런 말보다, 괜히 오지랖 부리다가 큰일 나지, 하는 말들이 더 흔한 세상이 되었다. 선의로 도와줬다가 해코지당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세상의 온기를 믿고 싶다. 국적도 인종도 뛰어넘는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 것에,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것에 조금 더 희망을 두고 싶다. 주변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시간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여행자가 길을 묻거나 무언가를 물어볼 때 런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기꺼이 동행해주곤 한다. 할머니처럼 오랜 시간을 내어주지는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나의 친절이 또 다른 친절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