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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텀민 Feb 18. 2023

여행지의 플라뇌르

J 인간의 P 여행

 여행을 좋아한다. 요즘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맑은 날씨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해마다 한두 번씩은 해외여행을 하곤 했다. 가까운 곳보다는 멀리, 길게 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새해만 되면 달력을 펼쳐 들고 몇 월에 빨간 날이 있는지, 어떻게 연차를 붙여야 최대한 길게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곤 했다. 여행은 좋아도 비행기 오래 타는 것은 싫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도 좋아한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솜이불 같은 구름, 모형 같은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Beef or chicken?이라는 문장을 들어야 여행이 시작되는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90%의 경우 Chicken을 선택한다. 실패 확률이 낮기도 하고 경험상 대부분의 Chicken 요리는 크림소스와 곁들여 내오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에 맞다. 기내식을 먹은 후엔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며 수첩을 꺼내든다. 거기서부터 나의 일정 짜기가 시작된다... 네? 비행기에서 일정을 짠다고요?


 여행을 계획할 때는 비행기와 숙소 정도만 미리 예약해 두고 손을 놓는 편이다. 여행할 도시에서 꼭 가고 싶은 주요 여행지가 예약이 필요한 곳이면 그런 곳들만 몇 군데 더 예약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선 여행지에 관한 책이나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여행 후기를 산발적으로 보며 시간을 보낸다. 분 단위로 일정을 짜는 사람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짧은 휴가에 분 단위로 일정을 잡아놓지 않으면 보고 싶었던 것을 다 보지 못하고 돌아올 거라 한다. 몇 번 시도는 해봤지만 성격이 세심하지 못한 탓에 항상 실패로 그쳤다. 비행기에 타서 기내식을 먹고서야 공항에서 도심까지 어떻게 가는지, 볼 만한 것엔 뭐가 있는지 여행 책자를 뒤져 결정을 한다(결정을 해도 여행하는 중에 다시 바뀌지만). 분 단위로 일정을 짜지 않아도 여행할 때 크게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기에 내 방식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J'로 끝난다는 것이다. J로 끝나는 사람들은 아주 계획적인 사람이라는데 나는 왜 이런 거지.


 내 여행은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여행 책자를 들여다본다. 갈 만한 곳들의 위치를 대충 묶어 오늘은 북쪽에 있는 것들, 내일은 남쪽에 있는 것들을 보는 거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가도 주변에 신기하거나 예쁜 것이 있으면 그 길로 새서 한참 시간을 보낸다. 걷다가 지치면 주변의 공원에 들어가서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지나다니는지, 손에 든 장바구니에 삐죽 튀어나온 저것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관찰하는 것은 참 재미있다(물론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한쪽 머리로는 사람 구경을 하면서 다른 쪽 머리로는 이제 어디 갈까, 고민을 한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주변의 식당을 검색한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돌아다니는 건 'P'형 인간이라고 했는데.

‘17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


 세밀하게 일정을 짜지 않은 여행의 단점특징은 많이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트가 정해져 있지 않은 탓에 효율적인 도보량을 계획하지 못한 탓이다. 걷다 보면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지나기도 하고,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해서 이런 여행이 나쁘지 않다. 걷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것을 많이 마주치게 되고 나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멋진 것'. 내가 여행에서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도보의 시작은 분명 이 관광지에서 출발하여 저 목적지(또 다른 관광지)로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샌가 '걷는 것'을 더 즐기고 있다.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가 정의한 플라뇌르 Flaneur가 되는 것이다. 플라뇌르란 도시를 한가로이 배회하는 산책자를 일컫는 단어다. 나는 정처 없이 걷는다. 지도도 펼치지 않고 그냥 걷다 보면 여행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유명 관광지가 나오기도 하고 마음에 쏙 드는 식당이나 소품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잠깐 들러서 구경을 한 후 다시 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걷다가 발견한 그 장소가 유명한 곳이었구나, 알게 될 때도 있다. 나는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사람처럼 걷고 또 걷는다. 서울보다 걷기에 좋은 거리들이 더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딱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그야 내가 분 단위로 일정을 짜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서울의 나는 항상 여기에서 저기로 가고 있지만 여행 중의 나는 '걷고 있다'.


 여행 중의 산책은 마치 도시를 읽는 것과 같다. 나는 걸으면서 도시를 읽는다. 노천카페에 앉은 예쁜 스카프를 두른 회색 머리의 할머니, 선글라스 낀 보기 좋게 태닝 된 피부의 커플, 에스프레소 잔을 앞에 두고 종이 신문을 읽는 중절모 쓴 할아버지. 너무 넓어 친숙하지 못한 한강에 비해 적당히 친숙한 폭의 센 강이나 테베레 강. 강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가로수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광장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고 있는 아이들. FC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아이와 함께 소풍 나온 아빠. 사각사각하지 않고 둥그런 모양이 많은 스카이라인과 그 위로 보이는 한국과는 다른 색의 하늘 빛깔.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중이었다면 내가 보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어쩌면 관광지를 들르는 것보다 산책길에서 보고 듣는 많은 것들이 오히려 나에겐 여행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에선 플라뇌르가 되고, J이지만 P여행을 한다.

‘14 파리
‘17 비엔나의 어느 길거리
‘17 잘츠부르크의 호프부르크 왕궁


 이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나는 70살이 되어도 체력이 받쳐주는 한 여행지의 플라뇌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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