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텀민 Nov 03. 2023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핑크색 셔츠를 샀다

 임신하고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아직도 이 질문에 대답하기까지는 몇 초 정도 버퍼링이 걸린다. 이 질문에는 후속질문이 바로 따라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원하던 성별이에요?


 왠지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원하던 성별이 아니라고 한들 내가 이 아이를 덜 사랑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원하던 성별이 딱히 없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사실 나도 내가 원하던 성별이 명확했는지 아기의 성별이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임신 초기에 사람들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딸이었으면 좋겠어? 물어보면 진심으로 어느 성별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특정 성별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해진 성별을 가지고 있을 아기한테 미안한 일 같았고, 오히려 임신하기 전에는 원하던 성별이 명확히 있었지만 실제로 임신하고 나서는 정말로,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건강하기만 하면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아기의 성별이 명확해지자 밀려오는 놀람과 아쉬운 감정에 내가 되려 놀랐다. 내가 원하던 성별이 있었잖아? 하고.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 좋았어요-하기엔 거짓말 같고, 원하던 성별이랑 달라요-하기엔 뱃속 아가가 다 듣고 있을 텐데 너무 예의 없지 않은가? 나는 아기의 성별을 들었을 때 솟아난 나의 감정에 스스로 부끄러웠고 아기한테 미안했다.


 누구에게나 로망은 있다. 우리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성별이든 좋다고, 아들이면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주말마다 축구를 하거나 캠핑을 좋아하는 우리와 같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캠핑 다니면서 재미있을 거고, 딸이면 귀엽고 예쁜 옷 입히는 재미, 머리 묶어주는 기쁨이 있을 거라는 소소한 대화를 했다(내 로망은 한쪽으로 좀 더 기울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지만). 하지만 정말로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성별을 알 수 있는 주수가 되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이 초음파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예측을 하고, 맘카페에 초음파 사진을 올리며 예측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글을 올리는 게 신기했다. 어차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될 텐데.


 내가 임신하기 전 나보다 다섯 달 앞서 임신한 친구의 젠더리빌 파티를 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아기를 가지니 나의 젠더리빌 파티는 본인이 해주겠다며 친구가 더 신나 했다. 젠더리빌 파티란 엄마아빠는 아기의 성별을 모르게 두고 제삼자가 성별을 먼저 확인하여 서프라이즈로 성별을 공개하는 파티를 말한다. 보통 풍선을 터트려 핑크/블루 컨페티로 확인하거나 케이크 커팅을 해서 핑크/블루 크림으로 확인하는데, 반응이 제각각이라 젠더리빌 파티 영상들을 보다 보면 보는 나도 같이 설레고 재미있다. 굳이 왜 그런 걸 하느냐 싶지만 임신 중 나름의 재미있는 이벤트고 이 핑계 삼아 친구들하고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추억도 생기니 한 번 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16주 차가 되었을 때 젠더리빌을 위해 담당 원장님께 아기의 성별을 쪽지에 따로 표시해 주실 수 있냐 여쭈었더니 그건 불법이라 안 된다고 하셨다. 결국 남편만 나 모르게 성별을 들었고 까만 점보 풍선에 특정 컬러의 컨페티를 채워 넣는 중대임무를 맡았다. 이번에는 친구네 부부도 모르게!

 친구의 젠더리빌 파티를 할 때부터 우리에겐 암묵적인 룰이 있었는데, 그건 파티 당일에 입고 오는 옷의 색상을 예상하는 아기의 성별의 색상으로 입고 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하는 성별이 아니라 예상하는 아기의 성별이라는 것. 우리 부부는 핑크색 셔츠를 준비했다. 나는 핑크색 옷이 없어 심지어 구매까지 했다.




 나는 핑크 셔츠를 입고 까만 풍선을 찔러 터트리고는 쏟아지는 파란 컨페티에 놀라 방방 뛰었다. 왜 놀랐을까. 핑크색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째서? 싶다. 왜 핑크색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혹시 나는 성별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딸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걸까? 근거 없는 확신이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토끼나 돌고래가 나온 태몽이며 나의 촉이 딸을 가리켰는데!


 

그렇게 나는 아들 엄마가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랑 다른 성별이라니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예쁜 원피스를 입혀 긴 머리를 땋아주는 로망은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백화점에 다니며 은근히 눈에 담아놓았던 예쁜 원피스들도 풍선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내가 엄마와 해왔듯 새벽까지 이은 수다며, 모녀의 해외여행 같은 것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내가 딸이라 그런지 아들과 엄마의 관계가 쉬이 예상되지 않는다. 나중에 아이가 사춘기가 찾아오면? 내가 모르는 부분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케어해줘야 할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미래들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나와 같은 성별이었다면 내가 밟아온 길이니 조금이라도 대비를 해 놓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내가 아들 엄마인 게 더 어울린다고 했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내가 딸의 감정을 섬세하게 케어해 줄 스타일이 아니라나. 그건 그렇다. 나는 무뚝뚝한 면이 있는 데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스타일보다는 쿨하게 넘기는 편이니까. 그 말을 듣고 나니 딸을 서운하게 만드는 무심한 엄마보다는 아들과 우당당탕 지내는 엄마가 되는 게 낫겠다 싶어 조금 위안이 되었다. 어떻게 되겠지. 내가 좋아하는 남편의 눈을 가진 딸이 궁금했는데 볼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아쉬운 점이다.


 나중에 셋이 어떻게 지낼지 생각하며 남편과 얘기하다 보면 기대가 되기도 하고, 전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상황들에 아득하기도 두렵기도 하다. 누구나 부모가 되는 첫 순간들을 가질 것이다. 엄마가 처음인 나, 아빠가 처음인 남편이지만 둘이서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파란 컨페티의 향연


작가의 이전글 회의 시간에 쫓겨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