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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Oct 09. 2022

추앙으로부터의 해방

뒷북 통통 나의 해방 일지(1-7편)

추앙... 

이 단어는 등장할 때마다 내장이 쭈그러드는 듯했다...

다른 단어는 없었을까... ㅋㅋㅋ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몰입을 깨는 단어였으나, 그럼에도 추앙을 추앙해 보려 노력해 보았다...


'나를 추앙해. 나는 한 번도 채워져 본 적 없어.'


그러나,

세상에 완전하게 채워졌다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늘 갈망한다. 그래서 세상사는 그런 갈망을 누가 더 잘 채워주느냐, 누가 더 섬세하게 그 갈망 포인트를 건드려 주느냐를 기준으로 돌아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 모두가 채워지고 싶어 하지 채워주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의 지지와 응원은 서로 주고받지만, 전적으로, 그저 있는 그대로 상대를 끝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꽉 채워져 본 사람이 없다. 꽉 채워준 사람이 없어서.

인간이 과연 누군가를 끝까지, 오롯이,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해 채워줄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의문이 든다. 완전을 경험해본 적 없는 불완전의 존재가 완전함을 줄 수 있을까.


염미정은 자기를 추앙하는 존재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그 자존감을 발판으로 세상을 뚫고 나갈 즉, 해방될 힘을 얻고자 한다. 염미정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위축되어 보이며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염미정이 진짜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본능적으로나마, 조금은 우스운 방법으로나마 정의 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소몰이처럼 몰아 살아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존감이 그런 막무가내식의 추앙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사람에게 스스로 폐를 더 잘 움직여 숨을 쉬라고 하는 것보다 타인의 심폐소생술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일단은 살아 있어야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고 해서 완전을 꿈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드는 의문, 완전을 경험해본 적 없는 불완전의 존재가 완전함을 누릴 수 있을까.


추앙받고 싶다는 염미정의 노골적이다 못해 오글거리는 표현은 정말 날것의 그대로였다. 사실 우리는 사랑 이상으로 추앙받고 싶어 하지 않은가. 염미정의 오빠 염창희는 '잘하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을 때 심장이 뛰는 거'라고 했다. 사람은 아예 나와 상관없는 것, 경험해 보지 못한 것, 또는 완전한 내 것에 대해서는 갈구하지 않는다. 애매하게, 불완전하게 경험해 본 것에 대해서 그 궁극의 것은 무엇일까 갈망한다.

주고받아야 하는 쌍방의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일방향의 추앙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끝없는 욕심의 현주소이고, 잔인한 한계다.


내가 숨 쉬는 거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시계를 보는 거더라고

툭하면 시계를 봐, 계속

'벌써 이렇게 됐나?'

'벌써?'

그러면서 종일 봐. 하루 24시간.

출근하고 퇴근하고 먹고 자고 똑같은데

시계는 왜 계속 볼까?

뭔가 하루를 잘 살아 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시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순 없겠지만

할 만큼 했으면 쉬고

잘만큼 잤으면 일어나고

그렇게 내 템포를 갖는 게

나에게 가장 필요한 해방이 아닐까.


'내 템포대로'


7화에서 해방 클럽 회원의 한 남자가 한 말이다. 

시계를 보며 나의 현 위치를 계속 확인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또 인간이다. 정말이지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제 아무리 똑똑하고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난리를 쳐도 우주의 먼지만큼도 모르는 게 인간이라니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는 고사하고, 죽을 때까지 하나의 인생도 통달하기 어렵지 아니한가. 평생 나는 나로 살지만 내가 누군지 알아가다가 죽는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다 알지 못한다. 


추앙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추앙하고, 타인으로부터 추앙받고 싶어 하지만 절대 추앙받을 수도, 추앙할 수도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추앙받을만한 존재가 아님을. 나는 누군가를 추앙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한계를 확실히 알고 나의 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은 시작된다.

우리 자력으로는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를 위해줄 수는 있겠지만, 구원해주진 못한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고, 내 템포라는 또 다른 시간으로 자위한다. 시간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또 다른 시간에 갇혀 있는 셈이다. 물론 조금은 덜 쫓기게 됨으로써 해방감이라 생각되는 무언가를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다. 해방된 느낌일 뿐이지. 언젠간 그 내 템포라는 시간에 또 갇혀 있는, 쫓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알을 깨어 나가는 듯한 등장인물들을 응원한다. 염미정은 추앙을 통해 해방을 꿈꾸지만, 나는 그녀가 추앙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그대가 구원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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