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소망이 없다 말할 때

❀tiny mini flowers❀ 열아홉 번째 이야기

by Autumnlim


벌써 12월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한 것들이 참 많았다. 작년에 비해서도 확실히 우리 가정은 성장했고 누리고 얻은 것이 많은 한 해였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더 어려워졌다. 물가는 최소 두 세배는 올라버려서 지갑에 두둑하게 돈을 넣고 다녀도 홀쭉해지는 것이 순식간이다.

힘들다고 하는 현지인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감이 안 잡힌다. 그들의 힘듦이 감히 내가 상상하고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기 때문이다. 나의 최선으로 그들에게 닿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내년에는 더 어려워질 거라며, 바닥을 찍을 거라는데 아직도 바닥이 아니었다는 것에 충격이다. 연초에는 올해가 바닥이다 하다가 연말에는 아직 바닥이 아니다 내년이 진짜 바닥이다 하는 말을 몇 년째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은 괜찮은가? 그것도 아니다. 평범한 줄 알았던 날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마침 한국에 있던 남편에게 받은 메시지에 멍-해졌다. 누군가 거짓뉴스를 합성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나라도, 내 뿌리를 두고 있는 조국도 참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는 괜찮은가? 아니다. 귀에 들리는 모든 나라들이 다들 '이번엔 진짜' 위기란다. 대체 좋은 때라는 게 있긴 한 건가. 역사책 속에나 있는 신기루인 건가 싶다.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 이제는 떠나야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마음이 더 뒤숭숭해진다. 왜 점점 더 소망이 없어질까. 이번엔 낫겠지 이제는 나아지겠지 했지만 들려오는 소식과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차 이게 바닥이 아니었어? 이게 끝이 아니었어? 더 나빠질 수 있구나!이다.


여러모로 깊은 우울함이 찾아왔다. 단지 내 개인의 상황, 문제가 아닌 시대와 나라에 대한 우울함이다. 짙은 안개가 바닥에 깔리듯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답답함, 무기력함 같은 것들이 몸속 깊은 곳 어딘가 쫙 깔려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산다. 나의 일상에 변화는 없다. 월요일이 되어서 레단에 나갔다. 아이들이 공부만 하면 싫어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타투 스티커도 챙겨 나왔다. 만나자고 했던 곳으로 갔지만 역시나 아이들은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ㅋㅋ 저번주에 말 걸었던 이발소 남자도 만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골목골목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다. 저번주에 같이 공부했던 귀여운 아이와 누나를 만났다. 아웅이랑 동생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오늘 안 나왔다고 했다. 얘랑 둘이 공부할 건 아닌 것 같아서 스티커를 붙여주겠다고 했더니 엄청 좋아했다. 역시 공부 프린트물보단 스티커지!

어휴 그런데 얼마나 꼬질꼬질하던지 스티커 붙이는 물티슈가 금세 까매졌다. 세수를 한 열흘은 안 한 것 같아 보였다. 깨끗한 물로 한 번 싹 씻기고 뽀송한 옷 입혀서 바나나 우유 하나 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만달레이 빈민지역 유치원에서 잠시 지냈을 때 아이들이 너무 지저분해서 수영을 핑계로 튜브 수영장을 사서 놀게 하면서 한 명씩 씻겼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묵은 때가 싹 씻겨 나간 뽀송하고 보드라운 아이들!


책도 읽어줬다. 얼떨결에 내가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연습하지 않은 책이라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시작했다. 아이는 어버버 거리는 나를 구경하기도 하고, 혼자 신나서 책 속 등장인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과!" "무!" 하고 외치기도 했다. 약간 혼자서도 잘 노는 스타일인 듯? 7살 다운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볼을 쓰다듬었다. 정말 귀엽다 너...


책 한 권을 그렇게 얼떨결에 끝내고 다른 책들을 E와 나 중에 누가 읽어줄까? 물어보니 당연히 E를 선택했다. 그래서 내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니 당황해하며 그럼 내가 읽어달란다. ㅋㅋ 아냐, 그건 나도 힘들어... 웃으며 E가 읽어줄 거라고 넘겼다. 역시 유창하고 재밌게 책을 읽어주는 E의 솜씨에 아이들을 책에 푹 빠졌다.


두 번째 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책으로 넘어가려는데, 이 귀염둥이가 이번엔 나에게 읽어달란다. 너 정말,... 마음도 생각도 귀여운 아이구나. 내 서운한 표정을 기억하고 잘 읽지도 못하는 나를 선택해 주는 그 다정함에 감동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완벽하게 읽어주기는 힘들다고 판단해서 아이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질문하는 식으로 방법을 바꿨다. "얘 표정이 어때?"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것 같아?" 하고 질문하니 아이가 술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비록 내 언어는 부족하지만 그걸 알고 채워주는 아이가 사랑스러웠고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음에 기뻤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때는 같이 공부하자! 7살이면 글자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란다!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눈에 익은 아이들이 보였다. 키보다 더 큰 커다란 마대자루에 플라스틱들을 모아 담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정수기에 넣는 커다란 물통을 수레에 담아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걸 보니 회사에서 고용한 아이들인가 보다. E는 회사가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이유가 월급을 절반 정도만 주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웃통을 벗고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데 깡말라 살이 하나도 없는지 근육이 너무 잘 보였다. 아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커다란 마대자루가 그 애의 삶이고 이 나라 같아 보였다. 어찌나 크고 버거워 보이는지.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도 지나쳐갔다. 해야 하는 일들이 있나 보다.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세 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길을 가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길래 불러 세우니 자동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너도 구걸하는 아이구나 싶었다. 우리가 뭔갈 주는 게 아니라 "스티커 붙여줄까?" 물어보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알겠다고 끄덕이길래 스티커를 고르게 했다. 아이는 좋아했다. 스티커를 원하는 부위에 붙이고 물티슈로 촉촉하게 불려 떼어내는 순간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표정은 보는 우리도 행복하게 만든다. 붙여주고 책을 읽어주고 있으니 우리를 아는 아이들 두 명이 다가왔다. 이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여자 아이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조금 큰 남자아이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이 아이들과도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담배 냄새가 엄청났다. 옆에 있던 작은 가게에서 담배를 파는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담배를 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라이터로 불을 켜서 담배를 피워댔다. 아이들이 옆에 있든 말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담배나 술을 사려면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살 수 없지만 이 나라는 아이들이 담배 살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피워도 뭐라 하지 않는다. 구걸해 얻은 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우는 아이도 있다. 길거리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빌어 먹고 담배 피우고 불장난하고 술 마시는 것이고, 그때 보고 자란 어른들처럼 길거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거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모두가 소망이 없다 말한다. 한국은 한국대로, 이 나라는 이 나라대로. 길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깨끗하게 씻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뭔가를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_시146:5,7'


소망을 이 땅에, 나에게 두면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아무도 내게 보장해 줄 수 없다. 그들도 제 인생 하나 어쩌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소망을 하늘에 둔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소망을 두기 때문이다. 주린 자들이 배부르고 갇힌자들이 자유를 얻는 날이 올 때까지 오늘 나는 내 몫의 일을 한다. 발을 이 땅을 딛고 있어도 눈은 저 너머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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