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나의 작은 아킬레스건

작은 악당과의 전투

by Minah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 종류는 참 다양해서 누군가에겐 그게 개인의 실력이나 능력치일 때도 있고, 신체적 결점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가족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고단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우리는 결코 그 무게감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 생각보다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많아 겉모습만 보고 어림짐작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리 가벼운 문제일지라도 그 취약점은 살면서 그 사람을 여러 번 걸고 넘어뜨렸을 테니까.

IMG_9780.jpg?type=w966 골드코스트의 패독 베이커리. 한글로 발음을 쓰니 조금 센 느낌이지만 커피와 베이커리로 정말 유명한 곳.


그런데 그 취약점이라는 게 너무 성질이 못돼서, 한 사람의 마음속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 평생을 세 들어 사는 것 같다. 난 쫓아내고 싶어 죽겠는데 나가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월세도 안 내면서 기어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찾아내지도 못하게 하는 작은 악당처럼. 이 작은 악당은 당당하지도 못해서 나의 불안감이나 괴로운 감정들을 틈틈이 훔쳐 먹으며 몰래몰래 덩치를 키워가지만, 숨어있는 장소를 들킬까 봐 절대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작은 악당이 존재를 드러내는 그 드문 순간과 타이밍이 있으니, 그건 내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시점이다. 쬐끄만게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싸워서 질 것 같으면 잘 나서지도 않다가, 내가 한껏 마음 놓고 행복을 즐기는 순간에 어김없이 그 존재를 드러내 그간 모아 온 모든 무기와 노하우를 써먹어 나를 잡아먹는 것. 그때 그 작은 악당은 내 마음속에 사는 대가도 못 내서 눈치 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기세를 몰아 위풍당당하게 이젠 주인 노릇까지 하려고 한다.

IMG_9749.jpg?type=w966 울타리로 둘러싸여 Paddock bakery인가 보다. 정원 햇살이 따뜻하고 좋은데 나는 안에서 바라보는 걸 택했다. 오늘은.


가장 방심하고 있었을 때 작은 악당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경험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역시 교훈이라는 게 생기고, 때로 그 교훈은 꼭 논리적이지만은 않다. 애초부터 그 교훈이란 게 이기고자 하는 이성적 전략에서 온다기보다, 지기 싫은 감정적 대처에서 오는 거니까. 그럼 나는 슬슬 평소에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행복하고 편안할 때, 그래서 내가 즐겁게 방심하고 있을 때 주로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 이제는 그 순간을 200% 즐기지 않기로 결심하는 거다. 내가 너무 행복해하면 어김없이 그다음 순간엔 그 작은 악당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애초부터 그 악당에게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IMG_9752.jpg?type=w966 안에도 바람이랑 햇살 잘 들어오라고 괜히 한 번 열어보는 창문.


근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게 '너무 행복해하거나 방심하진 말자'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을수록 거꾸로 마음이 열린다. 방심하지 않으려고 늘 너무 긴장하고 지내다 보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푸르른 하늘, 바다 냄새, 모래의 촉감에도 위로받게 되는 거다. 긴장하고 지낸 만큼 보답받고 싶은 기대심리였는지도 모르고, 작은 악당에게 티 내지 않고 몰래 행복해하는 방법을 터득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 혼자만 아는 꼼수로 그 작은 악당을 달래고 속여가며 크게 티 내지 않고 몰래 작은 행복들을 누려왔는데, 그래서 딱히 마음 놓고 맘껏 행복해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망할 놈의 악당이 또 나타났다.

IMG_9753.jpg?type=w966 손때 묻은 페인트와 책상의 아름다움을 서서히 알아가는 좋은 나이.


엄마가 다쳤다. 심장이 10센티 정도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몸이 바짝 굳어있다가 정신이 차려질 때쯤 들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작은 악당 놈이 실물로 눈 앞에 나타난다면 정말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아니 뺨보단 뒤통수. 너도 나를 매번 앞이 아니라 뒤에서 쳤으니깐 나도 똑같이.

IMG_9773.jpg?type=w966 사진이 너무 예쁘게 찍혔다. 심란하게시리.


며칠간 상황을 수습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봤다. 영화는 우리의 인생보다도, TV 드라마보다도 러닝타임이 짧았다. 그래도 두 시간 정도 내에 사건이 해결되고 기승전결을 거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내가 보는 모든 스토리에는 정해진 갈등과 위기가 있었고 결국엔 엔딩이 있었다.

IMG_9775.jpg?type=w966 신기하게도 사진을 찍는 장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하지만 내 인생이,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영화처럼 짧은 시간 안에 금방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예정된 시간도, 미리 정해놓은 줄거리도 없다는 것도.


그래도 불현듯 힘이 세진 상태로 다시 나타난 나의 취약점이, 그 작은 악당이 지나간 모든 기억들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불러와 나를 겁먹게 해도 과거처럼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IMG_9777.jpg?type=w966 분명히 어디선가 문이 열리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는 낙천적인 마음도, 근거 없는 부정적인 태도도 지금의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건 영원하지 않다는 그 사실에 기대서 쉬어볼 뿐. 그리고 행복하고 좋았던 추억들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굳게.

IMG_9783.jpg?type=w966 햇살과 그늘 조화 한 번 끝내준다.


이런 말하기 싫었는데, 역시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상태일 때 가장 강한가 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