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피아노 연습하는 영상을 (MBTI의 I 답게) 손 부분만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곤 했었다. 시작은 작년 12월부터였는데,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주최하는 피아노 급수 시험(ABRSM - 무려 8급이었다. 둘째 아이 돌이 되던 날 결과지를 받아 혼자 의미를 마구 부여하던 시험)을 통과하고, 새로운 피아노로 교체하면서였다. 많이 들떴고, 매일 무언가를 연습하는 영상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 산 피아노는 기본 어쿠어스틱 피아노와 디지털이 겸비되어있는, 일명 사일런트 피아노(가운데 페달을 누르면 디지털로 전환되어 밤에도 연습이 가능함)이다. 13살까지 예술학교 갈 것처럼 연습하던, 아니지, 연습시키던 선생님과 엄마 덕에 연습을 하긴 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예술중학교 시험 치고 그러면 돈이 많이 든다며 피아노는 취미로 하자고 후뚜루 마뚜루 결론을 내렸다. 그래 뭐, 내가 그렇게 천재처럼 잘 치고 그랬던 것도 아니니까. 피아노 치러 유럽으로 유학 간다던 옆에 아이를 보며 괜히 속이 쓰리긴 했어도, 쟤네 집만큼 돈이 없는 게 속상했지, 피아노 전공을 못한다는 게 속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피아노에 손 떼고 살다가, 꾸역꾸역 한국을 나와 지내면서 곧잘 외로웠다. 도서관을 찾아 한국 책을 마구 빌려보기도 하고, 빌려보고, 또 빌려보기도 하고. 사실은 그것뿐이었나 보다.
책도 좋았지만 2프로 부족했다. 내 영혼을 달래줄 친구. 사람은 아니었다. 그거 아는가, 외국에서는 한국인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거. 물론 이것도 나의 편협한 경험에서 나온 생존 방식일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아르바이트식으로 겪은 딱 두 번의 한국인 고용주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아 그 뒤로 한국인 고용주는 손절이다. (법을 지키며 깨끗하게 운영하는 많은 한국인 고용주께는 죄송합니다.) 국비지원으로 간 학교에 있을 때는, 같은 텀에 시작한 한국인 '언니들' 무리에 잘 못 꼈다. 은따였다가 왕따가 되었는데,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 나가 먹는 샌드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 커피나 만들며 생활비를 마련하는 주제에, 큰맘 먹고 디지털 피아노 한 대를 구매했다. 나만 기억하는 나. 매일은 아니지만 생각나면 뚱땅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 그 디지털 피아노를 이제는 팔고, 새로 우리 집에 온 피아노는 내게 의미가 컸다. 한국을 떠나온 지 10년이 되는 때, 내 돈 내산 진짜 피아노였으니까. 그리고는 흠, 그럼 어디 한 번 음악 하는 사람들과 소통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호기심으로 인스타 계정을 오픈했는데, 여전히 무엇이 두려운지 아무튼 나의 전체 모습을 보이기가 그래서 손만 찍어 올려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보는 것도 즐거웠고,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가끔씩 내 연습에 달리는 코멘트도 고마웠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팔로워 알람이 떠서 보니 ABRSM을 준비할 때 코로나 때문에 딱 2번 레슨 하고는 못했던 그 선생님이 아닌가. 아마 선생님은 레슨 홍보 차 이렇게 연습해서 올리는 친구들을 팔로우하시는 것에 가까울 것 같았다.
내가 지역을 태그 한 적이 있었나? 나인 줄 모르시겠지. 영상 찍을 때마다 (굳이) 결혼반지도 다 빼고 찍은 건데. 모르시겠지? 몰라야 하는데.
남편에게도 누누이 말하지만 나의 정신은 절대 성숙하지 않는다. 어른스럽게 대처가 되지 않고, 그저 숨어버리고만 싶은 심정인데 아무튼 더 우스운 건, 그 후로 절대 영상을 못 올리겠다는 거다. 내 부끄러운 피아노 실력 그 이상의 어떤 오글거림이 있었다. 선생님을 팔로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맞팔하면 나인 줄 아실까 봐(정말 도끼병) 맞팔도 아직 못하고 있다. 너무 웃기지 않은가. 그게 뭐라고.
사실 계속 안 올리다 보니, 또 안 올리는 게 곧 익숙해진다. 매번 반지를 빼는 것도 귀찮고, 굳이 찍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그대로 굳어버린 3개월짜리 피아노 계정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인스타 어딘가에 둥둥 떠다닌다는 썰.
그런데 말이지.
이걸 낯가림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나는 원래 이렇게 좀 사귀기 어색한 사람인가.
이렇게 부끄러워만 하고, 어색해하고(함정은 나만 그렇다는 거, 상대는 1도 생각 없음. 그런데 내가 느끼는 걸 상대가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함.)
이러다 사람은 언제 사귀나.
사람은 어떻게 사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