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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Aug 06. 2023

호주에서도 통하는 수저론

외국에 산다고 다 마당 있는 저택 같은 집에 사는 건 아니다. 호주 여느 동네가 그렇듯, 아파트와 하우스들이 섞인 동네에서 우리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지금 사는 동네는 교통이 편리하고 공원과 나무가 많으며 인프라가 골고루 갖추어진 지역이다. 학군도 좋은 편이고, 아시아인들이 많은 동네인데 그 덕에 동네가 더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느낌도 있다.


두 블록 건너가면 한인마트가 있어 부침가루가 다 떨어진 저녁이면 추리닝을 입고 걸어 나가 사 올 수 있고, 운전을 못하는 나로서는, 쇼핑몰, 병원, 아이의 학교 모두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어 편리하다. 모모를 데리고 산책 나갈 곳도 많고, 버스와 전철 두 가지 옵션이 가능하여 출퇴근이 편리하다.


삶의 발란스가 맞춰지는 곳.

대신 다른 지역에 비해 부동산 가치가 높은 곳.

그래서 요즘들어,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는 꼴로 우리가 이 지역에 붙어 있나 싶은 곳.



다른 지역으로 가면 되잖아?

멀고 조금 더 저렴한 지역을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이제 막 태어난 첫째와 낮잠을 자던 주말이면, 남편은 혼자 집을 보고 오곤 했는데, 어느 날 무척 신이 난 얼굴로 집에 와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고 했다.


곧 메트로가 들어올 거라는, 그 메트로를 타면 30분이면 시티를 오가지만 아직은 시공 초기 단계라 그때까지는 전철과 버스로 1시간 정도 출퇴근 해야 하는 지역. 신축 아파트고, 2층에 개인 마당과 바비큐, 맥주냉장고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건 아주 프리미엄 호라고, 나중에 되팔 때도 이 2층 아파트라는 메리트 때문에 잘 팔릴 거라고 했다.


마케팅 이름에 걸맞게 프리미엄을 얹은 값으로, 신도시 같은 느낌의 아파트만 우후죽순 있던 동네가 황량하다 느끼던 나를 남편은 설득하며 우리는 결국 그곳으로 이사했다.


이상하게 쎄했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따지는 남편이 무언가에 홀린 듯 너무 확신을 하며 좋아했던 곳이라(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참 이상했지만), 나중에 아이가 2층 마당에서 뛰어놀 생각을 하며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내 받아들이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이사 간 첫 주부터 개고생 문이 열림을 직감했다. 코로나 전이라 매일같이 출퇴근하던 때였는데 이제 막 9-10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출퇴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침에 준비하는 일은 물론, 버스도 자주 오는 지역이 아니라 한 번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야 하는 길은 곧잘 교통체증에 시달렸고, 겨우 탄 전철에는 자리도 없었다. 운이 나쁘면 1시간 반도 거뜬히 걸렸다.


퇴근 후 겨우 집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저녁을 하고, 이것저것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도 버거웠다. 우리는 쉽게 녹초가 되었고, 자주 예민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다퉜다.


당시 부동산에서 돈 잃는 게 쉽지 않은 시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뭘 해도 안 되는 것 같던 그 아파트를, 우리는 팔 때에도 억 소리 나는 손해를 보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이 친구네가 넘사벽 집을 샀다.

아직 아이는 첫째 하나였을 때였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둘째가 언젠가는 태어나 그 아이가 크기 전에는 더 큰 집으로 이사 갈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방이 2개이지만 계절이 바뀌는 걸 마주할 수 있는 아파트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2년 정도 후, 둘째가 태어나고 조금씩 방 3개 하우스를 알아보던 때였다. 번번이 먼듯 아닌듯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데, 어린이집에서 알던 첫째의 친구 - 이 동네에서 렌트를 하고 있던 친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우스를 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 친구네 집은 꿈에나 그리던 마당이 있는 2층 집으로, 1층에는 라운지가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우리 집 거실만한 크기였다.


양가 부모님께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며 '어마어마'를 강조하며 말하는 여자. 속물처럼 나는 그런 여자가 부러웠다. 물론 그 집 부부의 직업이 빵빵한 것도 있지만, 우리는 안다. 부부의 소득 만으로는, 이 으리으리한 집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넓디넓은 집에서 아이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놀이인 냥, 친구와 함께 위층아래층을 오르내리며 놀고 있었다. 아이라도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 그거면 됐다 싶었는데, 여자의 눈치가 심상찮다. 아무래도 아이가 위층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 첫째에게 얼른 주의를 주었다.


그냥 1층에서만 놀아. 왜요? 우리는 계단 오르내리는 게 재미있는데! 2층에는 더 폭신폭신한 인형들도 많아요. 그래도 2층은 친구가 자는 공간이고, 노는 건 1층에서 노는 거야.


그 후로 두어 번 그 집에 가면서 사실 가기 전에 아이에게는 2층으로 가지 말자고 당부를 했다. 정작 들어가니 이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게이트로 닫혀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가 집에 와서 말한다. 자기도 이층 집에 살고 싶다고. 우리 집도 걔네 집처럼 이층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저 집 아이와 우리 집 아이의 삶이 벌써부터 부모(혹은 조부모)의 재력에 의해 달라진 것 같아 마음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억대 연봉이고 뭐고 다 소용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의 최선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성과 실패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행착오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하고 성장해 부모의 운명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로 분가하는 것이다.

-전경린 [엄마의 집]



나는 무슨 수저인가, 나의 아이들의 수저는 어쩔 것인가

나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집에서 자랐다. 넉넉지는 않았던 살림에 그래도 부모님은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배울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방 3개짜리 아파트라는 말이 무색하게, 제일 작은 방은 너무 작아 남동생이 대각선으로 자야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떨어진다는) 한국의 집값도 한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닿을 듯 말 듯했던 이 동네 하우스 값 역시 이제는 감히 손을 내밀어 보지도 못할 만큼 올랐다. 그렇다면 duplex(하우스 두 개가 붙은 집으로 stand alone house보다 저렴하다.)가 어떨까 보는 사이 이 지역 집값은 500k~800k 정도가 올랐다. 이자는 오르는데, 정부에서 이민자를 계속 들이면서 집 값은 떨어져 봐야 100-200k 정도.


어디서 갑자기 6-7억에 가까운 돈을 메울 거냔 말이다.


아이 친구의 집처럼 으리으리한 집은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들과 모모가 뛰어놀 수 있는 아주 작은 마당이 있는 방 세개의 duplex 면 될 텐데, 그 조차도 힘들다.


수저의 힘을 못 이길 것만 같은 세상. 이곳에는 1년에 3만 불이 넘는 금액을 등록비로 내는 사립학교가 있다. 그마저도 waiting list가 길어 기다려야 한다는데, 회사에서 면접관으로 들어가 보면 지원자들이 사립학교 이름을 이력서에 자랑스럽게 쓰거나, 거기를 다녔다고 뜬금없이 면접 중에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인이 사립을 다녔다는 자체가 이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공부를 열심히 해서도 아니고, 부모의 재력을 이력처럼 쓸 수 있는 마인드를 갖은 아이들이 종종 보일 때면 씁쓸하다. 다행이라면, 회사가 그렇게 사립학교 나온 친구들을 우대하는 건 없다는 점. 그들만의 프라이드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사실 두려웠다. 우리 부부의 최선이 아이들의 한계가 될까 봐. 우리가 아무리 벌어도, 아이 친구가 살고 있는 그 집을 살 수 없다는 경제적 여력만큼, 아이의 미래를 어떤 형태로든 붙들까 봐.


그런데 글을 가만 보면 알겠지만, 정작 아이는 괜찮은데 나 혼자 느끼는 절망감이 더 크다. 이층 집에 살고 싶다고 지나치듯 투정 부린 아이의 말에, 나의 자존심과 욕심을 투영하여, 내가. 혼자서. 이미. 나의 아이와 저 집 아이의 미래를 비교하고 있었다.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두고 해야 한다고, 나의 가장 큰 경쟁자는 나 자신이라는 말들을 따르는 척 그런 척 살아가려 했는데. 못하고 있었다. 하필 저택같은 집을 산 여자는 한국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은근한 차별을 하던 사람. 그 여자가 집 알아보는 건 어떻게 되어가냐고 안부 차 묻는 질문은 종종 나의 수저를 확인하는 시간 같아 싫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약점이자, 치부. 부끄러운 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에피소드. 타인과 자주 비교했고, 자주 작아지던 참 별로인 나의 모습.


아이들에게는 집이 크던 작던,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사는 데에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녁 식탁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보드게임을 하고, 와하하 웃는 시간이, 사실 단칸방에 살아도 가능한 일인데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나 흔들린다.


내가 이렇게 흔들리면, 또 그 품에서 자란 아이의 마음은 훗날 얼마나 흔들릴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의 최선은 너와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위함이었다고. 너와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넓은 집에서 위층과 아래층을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니는 행복도 있지만, 엄마와 함께 쿠키를 굽고, 아빠와 함께 요리를 하고, 수다 떨고, 복작복작 굳이 작은 방에서 우리 가족 넷과 모모까지 함께 자는 날도 만들며 거기서 키득거리는 행복도 있다는 걸.


그래서 훗날 너보다 더 부유하게 자라온 친구들이 무엇을 더 가졌는가 자랑삼거든,

너는 부모의 사랑과 지지가 듬뿍한 가정에서 너만의 삶을 꾸려온 데에 대한 자부심을 자랑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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