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바다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현재를 살아갈 용기

by min

선명한 수평선만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가로질러 안내한다. 시원하게 뻗어 난 길 하나를 걸어가는 일은 상심 없고 쉬웠다. 끝은 이미 실눈을 뜬 눈꼬리 언저리에 매달려 있었고,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 걷는 내내 마음은 평온했다. 그곳에 닿을 수 있을지, 언젠가 닿기는 하는 건지 따위의 염려는 바다인 듯 하늘인 듯 푸르게 날아다니던 바람 앞에선 사치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고민없이 걸어가던 즐거움


사는 것이 이리 안정스러운 일이라면. 돌아갈 곳 있는 여행자의 걸음걸음에 더욱 달콤한 자유가 첨벙이 듯, 비록 여행의 끝에 서서는 마음에 시계추처럼 달린 쇳덩이가 무거워 삶을 질문하지만, 결국은 현실이 꼭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돌아갈 곳' 이 있다는 편리한 결말로 모든 것을 잠시 잊는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의무 같지만, 사실은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일련의 요소이다. 그 할 일이, 하고 싶은 일, 오랜 시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여전히 그 삶의 행간에서 부유하는 중이다.


오늘 새들의 목적지는 어디
어두워지면 친절하게 불까지 켜지는 바다 위의 길


이번 학기 논문을 마친 스물셋 친구는 졸업하면 구직을 하거나 박사과정을 하겠다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3개월 정도 러시아로 떠난다고 한다. 남자 친구가 러시아인인데 그는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지만, 본인은 러시아 대학교 부설 어학원에 등록하여 3개월 동안 언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고, 그의 가족도 만날 생각이라고 한다. 오랜 연애로 이미 러시아어는 Beginner 중에서는 꽤 높은 수준인 것 같다고 자신을 평가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배워보고 싶고, 무엇보다 그 나라의 음식,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단다. 그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보고도 싶다며 그녀에게는 첫 해외생활일 3개월의 여정을 포부 있게 이야기하는 당찬 인생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생각해보면 스물셋, 넷, 참 어리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기보다는 혼자 힘으로 세상 구경도 해보고,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한정된 그룹 안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다채로운 지혜도 접해보며 천천히 본인만의 세상을 열어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취직을 고려하는 것이 조금 더 성숙하게 존립된 자아로서의 삶과 균형을 맞물리지 않을까. 성급히 붙어버린 회사에서 취직의 승리감을 느끼기도 전에, 아득하게 정년까지 늘어진 권태로운 일상이 본인의 삶을 삼키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무튼 이십 대 초중반, 사회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하기로서는 길고 긴 인생에 대어 보면 참 어린 나이인 것만 같다. 물론 훨씬 더 어린 때에 시작하는 이들도 있고, 언제 시작하고를 떠나 사회의 사이클에 맞추어, 벗어나고 싶지만 감내하며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살아가는 인생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끈질긴 인생은, 훌쩍 해외로 나가 몇 개월 살아보겠다고 하는 누군가의 인생보다 당차지 않다고, 용기가 부족하다 말할 수 있을까?


육지와 바다를 잇는 다리- 변덕진 인생엔 다리 짓는 시간마저 필요하다


얼마 전 독일에 사는 친구 집에 한국인 친구가 놀러 왔다고 한다. 예전에 독일에서 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인데 서른이 훌쩍 넘어 남자 친구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본인 집에도 들렀다는 것이다. 남자 친구는 국내 대기업을 충실히 다니며 자부심도 꽤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남자의 경솔할 것만 같던 그 자부심은 그들의 디너 테이블에서 이유 있는 고개를 내민다.


한국에는 현실이 불만족스러워 그 대안으로 다른 나라에 더 나은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이다. 그런데 그 몇 퍼센트의 사람들 중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이는 소수의 사람들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주어진대로 살아간다. 나는 지금 이대로 살기로 한 사람이다. 더 나은 삶이 저 밖에 있을지라도, 그것에 눈 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의 뜻도 그렇고, 기업이 주는 사회적 지위도 그렇고, 모험을 감행하는 그 소수의 경우에 들어가지 않으며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 한 번쯤은 해보면서 일상의 권태를 떨쳐내고 돌아오곤 하는 일탈 속에서, 해외생활을 향한 희망 혹은 동경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용기도 용기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겠다는 다짐- 엄청난 용기가 아닐까?


싫은 것을 떠나는 것은 차라리 쉽다. 나와서 닥치는 고생들은 내 발로 뛰쳐나왔으므로, 돌아가기 싫어서, 한편으로는 그 고생을 당연하다 여기며 싸워내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더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밀려오는 후회와 같은 감정을 일상 속에서 온몸으로 받아내며 거르고 걸러 그 감정이 후회가 아니도록 해야 하는 일은 어찌 보면 더 묵중한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서른 중반이 넘어선 그는 가야 할 길을 마침내 곧게 정돈해둔 것처럼 보인다. 무수한 삶들이 바로 옆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본인이 가고 있는 곳, 가야 할 곳, 갈 수도 있었던 곳, 하지만 가지 않기로 한 곳을 분명히 알고 있는 그의 삶은 단지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삶의 태도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듯하다. 주말에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밤낮없이 일하는 것은 일상이지만, 현재의 삶대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엔 숙고된 용기가 묻어있다.



대학교 3학년 여름, 아직 무엇이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라며 교수님과 상담했던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께선 어릴 적부터 나는 무엇이 될 거야, 하고 꿈을 꾸며 살아온 이들은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힘이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너의 경우는 여러 갈래의 길을 지나면서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나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나 조차도 스스로를 알 수 없었던 것은, 하나의 확고한 꿈을 갖고 나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 택했던 길은 새로움을 향한 갈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교수님 말씀대로 경험은 많이 쌓였지만, 전공분야의 경력은 없는 서른이 되어 이제야 조금씩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윤곽만을 드러내니, 참 느리고도 느린 걸음을 떼며 생각한 것은 나의 삶대로 살아가야겠다는 것.


새로움을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현재의 삶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뜻밖의 결정을 하는 인생도, 그러다 또 정착을 해보는 변덕진 인생도 모두 내가 닦아가는 나의 길이니,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삶을 선택하든 그 순간 주어진 삶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하늘로 가는 길은 결코 하나가 아니겠지만, 종국에는 그 무수한 길 중 나의 길 하나 만들어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일찍이 그 길을 정한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대로, 여전히 헤매며 꽤 여러 갈래로 나뉜 길들을 기웃거리다 남들보다 느리게 무언가를 시작하게 되는 것도, 결국엔 남들'보다'라는 비교형일 때 초라해지는 것뿐이지, '내 인생에 따르면' 그건 맞는 페이스니까.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 저 바다 끝에 다다라
각자의 시간에 맞추어 하늘로 올라갈 테니 말이다.


느리게 살도록 운명이라도 지어진 듯한 내 인생은 오늘도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하루를 살아낸 우리의 삶을 토닥이는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느린 발걸음을 크지 않은 보폭으로 한 발짝 내민다.



Listening : Gamble - Lucy Rose

Drinking : 율무차

Photos : Margaret river - Western Austr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