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단단한 꽃을 피우는 날은, 당신 앞에 꼭 있다.
낙락한 볕이 드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삽으로 땅을 솎는다. 보통 텃밭을 만들도록 나온 길고 단단한 목재를 이용하여 제대로 지으려면 200불 정도 든다는 계산에 우리는 작은 울타리 모양으로 돌돌 말린 꾸러미 두 묶음을 30불도 되지 않게 구입하기로 한다.
우리 스타일로 만들지 모 :)
조금 더 길쭉하게 만들 수 있었던 우리의 재료가 썩 마음에 든다. 마침 방문하신 시외할아버지는 평생을 댁에서 텃밭을 가꾸며 사셨던 분이시다. 매번 내려가 뵐 때마다 시댁과 시외할아버지 댁에서 각종 채소와 과일들을 얻어왔는데, 이번에 텃밭을 만들어 볼 생각이라니 두 팔 걷고 나서 주셔 큰 도움이 되었다.
땅을 라인별로 고르는데, 지금 솎아내는 라인의 잔디와 흙이 전 라인을 메우며 섞여가도록 해야 한다. 금방 하겠구나 싶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고, 남편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질고 꾸덕한 땅들이 얽히고설키도록 솎아낸 후엔 미리 그려 놓은 아웃라인을 따라 울타리를 세워 나름 단단하게끔 고정을 시킨다. 마지막 베이스 작업으로, 솎아낸 땅 위로 비료 여섯 묶음을 시원하게 쏟아붓는다.
저렴하지만, 이제는 여럿의 손때와 추억이 묻은 텃밭
굵은 장갑을 낀 손으로 일일이 평평하게 고른 텃밭에 미리 사온 모종을 심는다. 상추를 너무 좋아하여 상추와 쌈장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하는 나의 재량으로, 두 종류의 상추와 함께 시금치, 쪽파, 그리고 브로콜리를 나란히 두었다. 심어놓고 보니 내 새끼들인 마냥 예쁘다.
벌레들이, 나비들이 날아와 쪼아 먹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망도 단다. 큰 돌들 몇 점을 구해와 하얀 망 끝을 돌돌 뭉쳐 고정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기로 한다. 나름 울타리에 못을 박아 망을 제쳐 놓을 수도 있게도 만들고 보니 우리의 작은 아이디어들은 현실이 되어간다. 이게 과연 될까 상상만 하고 시작하여서는, 손에 흙을 묻혀가며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블라인드를 한껏 올린 후 바라보는 텃밭이 즐거웠다. 당신 오늘 상추가 얼마큼 자랐는지 봤어? 쪽파가 똑바로 선거 봤어? 강풍이 불던 밤에는 잘 견뎌내고 있는지 걱정되었고, 가랑비가 내리던 날에는 꿀꺽꿀꺽 물을 삼킨다는 생각에 즐거워하며, 햇빛이 따사하게 내리쬐는 날에는 엄마의 품에서 나른한 낮잠을 즐기는 것 같아 마음까지 따뜻해지던 시간들로 작은 텃밭은 우리의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와 함께 채소들도 무럭무럭 초록 내음을 무성히 풍기며 자란다.
자연이 키워낸 우리의 작은 양식
싱그러운 상추와 파릇한 시금치 한 땀 한 땀을 따며 고맙다 고맙다 속으로 되뇐다. 빗방울과 햇살을 한 움큼씩 머금은 탱글탱글한 초록에 자연의 정성과, 그간 조금은 메마른 주말 아침이면 물을 뿌려주던 우리의 마음이 더해졌다고 생각하니 음식을 하는 부엌에서도 마음만은 이미 충만해진다.
졸졸졸 흐르는 물에 상추의 벌레 먹은 부분까지 조심조심 문질러 가며 흙을 씻어낸다. 작은 구멍이지만 야금야금 갉아먹힌 상추의 자연스러움이 차라리 좋았다.
지난 글 한 송이 브로콜리를 피우기 위해에서 이제 막 얼굴을 봉긋 내민 브로콜리를 소개하였는데, 그 후로 어느새 이만큼 자란 브로콜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심은 채소 중 단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제 모습을 찾은 크고 굵직한 녀석.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여 우리의 작은 텃밭에서는 다시 키우지 못하게 될 것 같지만, 느리더라도 얼굴을 내밀기 전 이파리를 숭덩히 치는 준비 작업을 충분히 한 후 본인 페이스에 맞추어 자라나는 브로콜리에게서 배운 점도 있다.
다른 채소들은 한 달이면 제 모습대로 자랐는데, 브로콜리는 세 달 정도 걸렸으니 남들의 세 배나 느린 속도였지만 결국 브로콜리의 제 모습을 찾아가는 시간은 한 달이 아니라 세 달. 그 브로콜리를 한 달안에 먹으려 했으면 가능한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재촉을 해대는 탓에 괜한 스트레스만 더 주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브로콜리 자신도 옆 친구들과 비교하여 느린 성장에 낙담이라도 했다면, 그들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초록빛 꽃을 피울 자신을 보지도 못한 채 이파리로만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조바심 나는 삶. 남들보다 못할까 비교하며 끙끙 앓는 시간들.
오래전 한 다큐멘터리에서 아이가 시험을 보고 와서 점수를 말했을 때 우리나라 엄마와 미국 엄마의 반응을 비교하였던 적이 있다. 아이가 100점을 맞았다고 하였을 때, 미국 엄마는 잘 하였다고 칭찬을 하는 반면, 우리나라 엄마는 너희 반에 몇 명이 100점을 맞았니, 물어보고 그 수가 많으면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실험으로 엄마들에게 4000원을 주었을 때 뇌의 반응이었는데, 미국 엄마들은 4000원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 한국 엄마들은 다른 사람들이 본인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불만족스러운 반응이 나타난다. 미국 엄마들은 남들이 더 많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아주 미미한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한국 엄마들의 비교가 자녀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였고, 더 나아가 비교의식이 팽배한 사회의 일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쓸데없이 자꾸만 옆사람을 보게 된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생명만 있을 뿐.
작은 텃밭을 우리 마음대로 다 만들어댄 후에는, 허브 팟을 하나 장만하여 Rocket Salad, Basil, Parsley를 심었다. Basil만 모종이고 나머지는 씨앗으로 뿌렸는데, 한 달 후엔 기특하게도 겹겹이 쌓인 흙들을 뚫고 나와 또 이렇게 다들 훌쩍 자란 모습이다.
한쪽은 모종을 심어 놓고, 한쪽은 씨앗을 뿌려놓고는 오히려 씨앗을 뿌린 쪽이 더 늦게 자라겠다며 괜한 걱정을 한 건 나였지, 조용히 젖은 흙 속에서 숨 쉬고 있던 씨앗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모종이었던 Basil은 너무 빨리 자라 버려 우리가 금세 먹지 않으면 벌레에게 먹히거나 시들어 버렸지만, 뒤늦게 자란 Parsley와 Rocket Salad는 의외로 풍성하게 자라 꽤 오랜 기간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허브팟에는 Parsley와 Rocket Salad만 남아 있다.
텃밭을 가꾸다보니, 더 빨리 자라든 천천히 자라든, 간혹 거칠게 몰아대는 오클랜드의 바람에도 다음 날 우뚝 서 있는 채소들을 보면 참 기특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우뚝 제 자리에 서 있는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꼭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것에도 꽤 큰 에너지가 소모되니, 그대로 그 시간을 이겨내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어떨까. 서두르지 말고.
브로콜리처럼, 조금 더 단단한 꽃을 피우는 날은 당신 앞에 꼭 있으니 말이다 : )
Drinking : 1837 black tea
Listening : Milk & Honey - Billie Mar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