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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은 모래 안 갖고 왔어요

아이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들

by min


첫째가 크레용으로 벽에 낙서를 해놓았다. 공식적으로 아이가 집에 한 첫 낙서이다.


한깔끔 하는 성격의 남편이 이것 좀 보란다. 벽도 아니고 문 여닫는 쪽이었는데, 심하지도 않고 지우면 지워질 것도 같았다.


이제야 애들 사는 집 같고 좋네 뭐


평소에도 아이에게 '장난감으로 벽 긁지 마라, 바닥 긁지 마라, 문 살살 닫아라' 누누이 말하는 남편. 식사 후에는 손 씻으러 가는 아이에게 손 씻기 전까지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 여기에는 화장실 불 켜는 스위치도 포함되는데, 이유는 저녁을 종종 손으로 만지는 아이의 기름진 손이 벽이나 스위치에 닿으면 더러워진다고. 잔소리 대마왕이 따로 없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다가도, 와이프인 나 역시 피해 가지 못하는 그의 얄미운 잔소리병에 대고 이때다 싶어 일부러 약 올리는 소리를 했다.


개인적으로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행사하게 되는 일을 짐짓 두려워하는 편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지어주는 것은 알려줄 수는 있지만, 아이가 노는 방식, 삶을 바라보고, 또 그것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의 패턴이나 환경으로부터 영향받을걸 생각하면, 혹시나 아이를 남편과 내가 만든 세상에 국한하여 키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같은 것이 마음 저변에 깔려있다. 그이도 나도 너무나 불완전한 인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모든 부모는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의 최선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성과 실패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행착오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하고 성장해 부모의 운명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로 분가하는 것이다.

-전경린 [엄마의 집]


어렸을 적 비 온 후 놀이터 옆, 진흙이 되어버린 화단의 흙을 얼굴과 손, 옷에 마음껏 묻히며 마음껏 노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엄마를 특히 무서워한 나는 저렇게 다 묻히고 갔다가는 분명 크게 혼날 거라는 사실에 감히 진흙에는 손도 못 대고 그 느낌만 궁금해하며 옆에서 멀뚱멀뚱 지켜만 보던 시간이었다.


'젖은 흙은 차갑겠지. 저렇게 손에 쥐어 손가락 사이사이로 나오는 진흙의 질퍽함은 꼭 연약한 지점토 같을 거야. 만약 내가 저걸 만질 수 있다면 나는 케이크를 만들 텐데.'


걱정이 뭔가요 하는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진흙을 양손으로 주무르며, 비에 젖은 흙냄새를 온몸으로 즐기는 친구들이 그때도, 떠올리는 지금도 부러운 걸 보면, 나는 정말 혼날 걱정 없이 친구들 틈에 껴서 놀고 싶었다.


아이가 이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생활 잔소리가 은연중 아이의 무의식에 주입되어, 시기에 맞게 앞뒤 가리지 않고 즐겨야 할 상황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훗날 그 모든 순간을 오롯이 누리지 못한 아이에게 지는 마음의 빚은 훨씬 더 클 테니까.


그래서 아이가 밖에서 진흙을 묻히고 오면, 느낌이 어땠는지, 냄새는 어떠했고 또 무엇을 만들며 놀았는지 물어봐주는 엄마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쉽지가 않다.


사실은 요새 자꾸 어린이집에서 모래를 잔뜩 바지 주머니에 갖고 와서 얼마 전에는 기어코 아이에게 한마디를 했다.


"수박아 이러다 어린이집 모래 다 거덜 내겠다, 그만 가져와야 엄마 아빠도 일 하나가 줄어."


그런데 다음날 아이가 와서는 대뜸 엄마, 오늘은 모래 안 갖고 왔어요, 한다. 이 한마디에 심장이 또 철렁 하는건 왜일까. 아이가 내 말에 신경 쓰고 있었구나, 혹시 모래를 집에 갖고 오게 될 걸 걱정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으면 어쩌지 괜히 또 마음이 무거워진다.


적당선을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고심하다 아이에게 다시 말한다.


"모래밭에서 신나게 놀고 와. 생각이 나면 모래를 털고(매번 모래를 집에 갖고 와도 된다고는 못하겠는 게 함정) 까먹었으면 바지는 나중에 밖에서 털으면 돼."


나의 편리를 위해 아이가 아이다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빼앗는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조금 더 너에 가까운 네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다짐과 반성을 번갈아가며 시행착오를 겪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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