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것을 지우는 본질보다는 그걸 쥐고 있었던 내 손이 생각나 적는다
"오늘의 주제 드립니다. 지우개, 안좋은 기억과 흑역사들을 지우개로 박박 다 지워버리고 싶네요^^
오늘의 글도 기대됩니다!"
오늘의 글쓰기 주제를 알려주신다. 안 좋은 기억, 흑역사, 많고도 많다. 지우개가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듯 영화 이터널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듯 안 좋은 기억이나 흑역사를 다 지우면 얼마나 좋으려나. 아니 나 또한 누군가의 안 좋은 기억이나 흑역사라서 나도 지워지려나.
이랬거나 저랬거나 '지우개'를 듣는 순간 생각나는 것은 나의 흑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쥐고 있었던 내 손이었다. 내 손, 울퉁불퉁하고 거무잡잡한, 그리고 핏줄이 도드라지는. 이십년도 더 된, 내가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 나이였을 무렵이었다. 우리 미술 선생님은 그렇게도 내 그림을 칭찬해댔다. 내 인생이 그래서 꼬였지. 아니, 이게 아닌데.
미술 선생님은 아이들이 체육복을 갈아입을 틈을 제공해주는 그 다이 위에 있는, 뒤통수가 매우 볼록한 티비에 내 그림을, 선생님의 소중한 DSLR 카메라로 찍어 띄워주며 '소질이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 덕에 정말 소질이 있는 줄로 알았던 나는 가난했던 집안 사정 덕분에 미술을 시작하지 않을 뻔 했으나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던 선생님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동아리도, 방과후 교실도 모두 미술부를 들었더랬다.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본인이 나가고 싶으셨는지-지금 내가 생각할 때는 선생님도 학교를 무척이나 나가고 싶거나 빠지고 싶었을 것이라 본다-그렇게도 각종 미술대회에 참가시켜 주셨다. 대회는 주로 토요일이었는데 학교를 빠지고, 게다가 출석을 인정받으며 학교 대신 대회를 나가면 선생님은 꼭 서울역 버거킹에서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버거 세트와 팥빙수를 사주셨다. 친구들과 그걸 나누어 먹는 낙에, 학교를 빠지는 낙에 신나서 놀아댔던 기억, 그리고 그때의 친구들과 같은 반도 한 적 없지만 여지껏 죽고 못사는 관계를 맺게 된 추억이 있다.
어쨌든 그때 함께 나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중 한 친구-남학생이었다, 좋아하진 않았다-가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손을 보고는
"흐엑, 네 손이었어? 나는 남자 손인 줄 알았어?"
라고 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손에 대해 무척이나 신경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놈의 자식.
그때부터 다른 곳에 비해 지나치게 살이 없고 마른, 그리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까만, 게다가 외삼촌의 손처럼 너무나 투박하게 핏줄인지 힘줄인지가 도드라진 진 내 손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보부상 대표로 가방에도 필통에도 이것저것 들고다니는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학용품들을 빌려다 쓰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내가 의식하고 있었던 우리반 남자애가 나에게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그냥 턱 하고 줄텐데. 그땐 뭐가 그렇게 의식되고 부끄러웠는지 지우개를 필통에서 꺼내 엄지와 검지로 들고는 손목을 한번 비틀어 지우개를 쥔 손가락이 하늘로 향하도록, 내 못생긴 손등이 책상쪽을 향하도록 틀어 수줍게 건넸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걔는 고르지 못한 치열이 부끄러워, 남학생이라 입을 가리고 웃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굳이 굳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했다. 전혀 모르겠던데.
지우개를 들었던 내 손도 나에게만 부끄러운 거였겠지 싶다. 실은 그 안에 건네려던 지우개가 더 중요한 거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내 손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거칠어지지 않도록 핸드크림을 잘 발라주며, 그 안에 쥔 지우개를, 알맹이를 집중하며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내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