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같은 엄마는 되기 싫었어. 아니 되지 못할 것 같아.
엄마, 혹시 다음 주에 애 좀 잠깐 봐줄 수 있어요? 나 치과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한두 시간 정도만.
첫째 낳고 출산휴가가 끝나면 방학까지 한 달 반만 출근하면 되길래 바로 휴직하지 않고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랑 함께 일하는 엄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 사업이 바쁘지 않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출근하는 한 달 반 동안 첫째를 봐줬다. 월화수목금 매일을 버스와 전철을 타고(아니, 운전도 할 줄 알고 차도 있는 냥반이!!) 출퇴근을 했다. 성질 더러운 딸내미가 요구하는 대로 수유텀 맞춰 먹이고 시간 맞춰 재우고 소변이며 대변 본 시간까지 기록해 줬다. 아기 낳은 지 백일도 안 되어 돈 벌겠다고 나가서 모유먹이겠다고 때맞춰 유축해 오고 운전도 할 줄 몰라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곳을 버스-전철-다시 버스를 갈아타며 오가는 딸이 안쓰러워서 그랬을까.
물론 그렇겠지만, 그냥 엄마 자식이라 그리 해준 거겠지. 그러니 우리가 이사하고 거짓말처럼 한동안 내놔도 팔리지 않던 엄마집이 팔려 이사할 곳을 알아볼 때 첫째 육아를 도와주겠다며 우리 집 옆단지로 이사 온 거겠지. 이제는 안다. 그저 주려는 엄마 마음. 바보처럼, 첫째를 맡기고 출근하던 그때는 엄마가 첫째를 봐주는 동안 식사는 어떻게 하셨는지 어떤 짬이 나서 빨래를 개켜주고 청소를 해주고 설거지도 해줬는지 생각지 못했다. 그저 내 애가 시간 맞춰 먹었나, 몇 ml를 먹었나, 똥은 몇 번이나 쌌나 그런 것만 궁금해했을 뿐. 같은 시기의 둘째를 돌보니 그때의 엄마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싶다. 새삼 고맙고 미안하다.
엄마는 왜 동생만 예뻐해?
일곱 살 어린 동생이 있는 첫째가 한 말이 아니다. 여섯 살 어린 동생이 있는 삼십 대 중반의 내가 한 말이다. 아니, 해온 말이다. 그렇게 엄마 도움을 받고도.
여섯 살 때였는지, 일곱 살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4인용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이 식탁이 꽉 차겠구나! 넷이 마주 앉아 밥을 먹겠구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특하고 귀엽고 웃음이 조금 나온다. 밥을 함께 먹을 생각부터 했다니 기특하고 아기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려면 얼마간의 기다림과 연습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이의 생각이라 귀엽고 웃기다.
아주 더운 여름날 동생은 집에 찾아왔다. 내가 둘째를 낳을 땐 어떻게 하면 내가 없어도 첫째가 불안하지 않을까를 생각했는데 막상 동생이 태어나 집에 오던 때 일곱 살의 나는 어디서 누구랑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구나 싶다. 처음 만난 동생은 정말 하얗고 작았다. 유치원에 갔다 오면 동생을 보고 만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손도 씻지 않은 채 아기에게 갔던지 손 씻고 오라고 지적받은 기억도 약간 있다.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았는지 뽀뽀를 할 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했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쪽쪽 쪽쪽 쪽.
동생이 엉금엉금 기고 앉을 때쯤부터 그렇게나 예뻤던 동생이 조금 미워졌다. 엄마가 동생만 예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생이 내 방에 있다가 바퀴 달린 의자에 손인지 발인지 껴서 울자 엄마는 다짜고짜 내 등을 내리쳤다. 동생이 내 물건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뜨렸는데도 동생은 혼내지 않았다. 그때부터 엄마는 나를 안 예뻐하는구나, 동생만 예뻐하는구나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도 예뻐해 줘, 나도 예쁨 받고 싶어 그런 마음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동생이 정말 아기니까 좀 더 챙김을 받아야 해서 그랬다면, 중고등학생이 되자 그걸 대하는 내 마음에 자꾸 불만이 생겼다.
아빠 사업이 잘못돼 반지하 월셋집에 살며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중학생 때, 필요했던 단 한 가지는 엄마아빠의 인정, 칭찬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손수 만들어준 고구마튀김과 같은 간식도 참 맛있었지만 그래서 좋았지만 더 필요했던 건 인정과 칭찬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좀만 더 미리 공부하면 더 잘 했겠네.’라는 아쉬움의 말이었다. 좀 더 미리, 좀 더 잘하면 인정하고 칭찬해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미대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생은 딱 한 번이었지만 전교 10등을 찍었다. 당시 우리 학년은 580여 명이었다. 아 나 진짜 잘했었네. 수학은 ‘미’였던 걸 감안할 때 그 등수는...! 수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100점이었던 기억이 난다. 7과목이 100점이었고 수학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과목의 점수도 90점을 넘어, 당시 전교 1등이던 친구가 수학 아니면 질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미술을 때려치우고 수학을 했어야 했는데... 미대입시를 고집하며 집안의 돈을 쭉쭉 빨아먹었으나 결국 대입 실패로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그리고 재수학원 가서 수학을 했다지).
재수를 하며 쭈구리가 되었다. 미대입시에 재수학원에 쓴 돈이 어마어마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들어간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돈을 내지 않고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입학시를 제외하고는 전액이든 소액이든 장학금을 타고 학교의 여러 제도를 이용해서 교재비, 식비를 받아가며 학교를 다녔다. 교사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나니 사범대가 아니었기에 교직이수를 해야 하고 그건 과의 정원 10% 내에만 준다는데, 우리 과는 해당 인원이 2명이었다. 그럼 1등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1등을 했다.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했다.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대단하다, 롤모델이다 하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집에선, 당연하게 여긴 것 같았다. 네가 너무 대견하다고, 자랑스럽다고 나는 그 말이 고팠다.
졸업과 함께 본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후, 1년 간 공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간강사로 한 달 조금 넘게 일을 하고 손에 쥔 돈과 재학시절 지원받아 긁어놓은 임용고시 강의만으로는 1년을 버티기엔 부족했다. 돈이 어디에 얼만큼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집에 말하고 지원을 부탁했다. 엄마는 대번에 이번에 떨어지면 네가 기간제를 하든 해서 벌어서 해라-하셨다. 서럽지만 별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바짝 했다.
취업에 성공했다. 합격소식에 엉엉 울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그동안은 별 수 없지 생각했던 것들이 울컥 다가왔다. 왜 나에겐 야박하고 동생에겐 넉넉하게 해 주는 거지? 하는 생각에 분했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할 때도 비슷한 생각이 왈칵왈칵 올라와 날 괴롭혔다. 결혼한다고 무엇을 해주진 않으면서 동생이 자취한다니까 왜 자꾸 알아보고 그러지? 동생만 돈을 해주는 건가? 왜 쟤는 그냥 되고 나는 그냥 되는 게 없는 거지? 한번 서운했던 마음은 터진 둑으로 넘쳐 나오는 물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왜 동생만 예뻐해? 나는? 왜 나는 그냥 되는 게 없어?
엄마는 울었다. 너무하다며 울었다. 네가 알아서 잘하니 너를 그냥 믿은 거였다며. 슬프고 화났다. 나도 어렸는데. 일곱 살 어린애였고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다 나도 처음이었는데. 내가 무언가를 바랄 때 우리 집은 어려웠고 동생과 여섯 살의 터울이 나는지라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의 집안 형편은 조금 더 나아졌었다고.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받는 장학금은 왜 당연하고 동생의 학비는 왜 엄마가 모아줬을까. 몇십만 원으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을 때 보내주지, 왜 안 보내줬을까. 기숙사에도 너무 가고 싶었는데. 그럼 좀 더 편히 공부했을 텐데. 핸드폰도, 노트북도 난 내가 샀어야 했는데 동생은 왜 해줬을까.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잘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내 딸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한다고 했다.
사실 아직도 서운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참 힘들고 난감했을 거라는 걸. 둘째를 낳기 전엔 둘째를 낳아도 절대 성장앨범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치만 낳고 나니 첫째 해준 건 해줘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첫째처럼 성장앨범을 계약했다. 그런데 또 둘째를 너무 예뻐하기엔 첫째 눈치가 보여 티가 안 날 만큼만 예뻐해 준다. 첫째가 원하는 음식, 놀이를 맞춰해 주다 둘째가 또 뒷전이 된다. 그러면 아차 싶어서 다시 눈을 맞추고 안아준다. 이전글 ‘좋은 엄마 나쁜 엄마’에서처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어 계속 이렇게 저렇게 좋은 엄마가 됐다 나쁜 엄마가 됐다 한다.
엄마는 첫째를 보던 때 밥을 어떻게 먹었을까. 아니, 30여 년 전,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어땠을까. 이제와 궁금하여 묻는다. “엄마는 어땠어?”
엄마는 힘들었다며 말을 아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싶었는데, 그래서 나만 손잡고 훌훌 다니면 됐는데 다시 갓난아기가 생겨 짐도 바리바리 잔뜩 생겨 너무 힘들었다고. 그랬을만하다. 난 이렇게 엄마가 도와주는데도 벅찬데 엄마는 도와줄 친정엄마도 없으니 어땠을까. 게다가 엄마아빠와 함께 사는 동생도 우리 첫째를 돌봐주며 날 도와주는데 엄마는 동생들도 멀리 살고. 아빠는 사업을 시작해 바빴을 거다. 엄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뭐 좀 하려고 하면 남편이 둘째 좀 크고 얘기하자고 하여 내 인생은 도대체 언제부터 내 맘대로 되나 싶어 우울할 때가 있는데 엄마는 결혼과 함께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던 그 시절에, 엄마는 엄마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2남 5녀의 장녀로, 이른 나이에 시골에서 멀리 상경해와 아내가, 그리고 엄마가 되었을 그녀가 안쓰럽고 짠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엄마는 취미 생활도 있고 엄마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나라는 딸년은 또 발목을 잡는다. 작년 내내 첫째의 유치원 등원을 도맡아 해 주고 드디어 졸업이다 했던 엄마는 내가 둘째를 낳자 할 게 없어서 터울 져서 애를 낳는 것까지 따라 하냐 웃었고, 나는 그러게-하며 따라 웃었다. 엄마는, 지난 주말에 고기 먹으러 오라니 먹지는 않고 둘째만 놀아줬다. 먹으러 오라니 애 보러 왔냐니까 사실 두 시간 전에 밥을 먹어 배부른데 너 편히 먹으라고 왔다며 실컷 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반찬을 하면 내가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날이 더워도 추워도 비가 와도 기꺼이 갖다 준다. 갖다만 주고 쿨하게 가버리는 엄마지만 이젠 안다. 그동안 칭찬과 인정을 못 받아, 지원을 못 받아 서운하고 서러웠지만 엄마의 고구마튀김이, 내 딸에 대한 사랑이, 반찬이 다 사랑이었다는 것을. 커피 기프티콘을 받았다며 함께 마시자고, 너 편하게 너희 집에서 마시자고 하는 엄마는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으리라- ‘너 같은 딸 낳아 키워봐라’ 하지 않은 엄마에게 모질게 말했었다. 근데 이젠 안다.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기 위해 첫째와 둘째를 열심히 저울질해 가며 각자에게 최선을 다할 테지만, 엄마는 분명 엄마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걸. 엄마가 나에게 서운하게 했던 때만 쏙쏙 기억하고 잘해줬던 때는 당연하게 여긴 건 나였다는 걸. 이제야 취미생활하며 즐거움을 찾은 그녀에게 조금의 여유가 생긴 지금도 나에게 쏟아주는 그 마음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엄마에겐 엄마가 항상 뒷전이었다는 걸.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렇게 쏟고 희생할 수 없을 거란 걸. 엄마 같은 엄마는 될 수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