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인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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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 공고가 났다.
7급 수의직
3명을 뽑는다.
인턴 노예생활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듯했다.
국어, 국사 그리고 미생물학을 준비하면 된다.
국어는 막연히 만만했다.
국사는 조금 마음에 걸리고
미생물학은 수의 미생물학 신판을 서점에서 구입했다.
어차피 공부해서 나쁠 건 없었다.
미생물학에는 전염병, 약리학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세균, 바이러스 그리고 항생제
다 임상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다.
원장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나를 보고
약간 당황하는 눈치다.
임금 협상 때 그렇게 고자세이던 원장이었는데
보란 듯이
내 힘으로 당당하게
병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동료 수의사와 미용사에게
약간 미안했다.
배신자가 된 기분이다.
이제 요령껏
최소한으로 병원 일을 하고
틈틈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다.
책 읽기와 공부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나'였다.
성적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공부에 일가견이 있다.
그렇게 국사 문제집 한 권과
두꺼운 수의 미생물학 한 권을 한 달여 만에
통독했다.
시험 당일 날
어느 모처 고등학교 교실
날씨가 우중충했다.
복도 쪽 창문가 중간쯤 앉았다.
대각선으로 교실 뒤쪽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4학년이었던 여자 선배가 있다.
키가 크고 날씬한 선배였다.
나를 못 알아본 듯했다.
대학 때 존재감이 없던 나였다.
저 선배는 어디서 있다가
시험을 치러 왔을까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그렇게 교실에 모여 앉아 있다.
3명을 뽑는데
180여 명이 왔다.
60명씩 3반으로 나누어 시험을 봤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3명을 뽑으니
합격하려면
반에서 1등을 해야 한다.
초등학생 이후
반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요행을 바라야 한다.
무슨 문제를 풀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한 문제 기억나는 게 있는데
당시 대장균 식중독 사건이 연일 뉴스에 나왔었다.
그 문제는 그때 유행하는 대장균(O157:H7)의 유전자 형을 묻는 문제였다.
무릎을 쳤다.
예상했어야 했다.
당연히 몰랐다.
그냥 찍었다.
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뒤에 있던 선배가 온데간데 없다.
아마 후배랑 같이 시험을 본 게
창피했던 걸까
합격자 발표가 날 때까지
왠지 모를 희망을 품고
아니 요행을 바라고
하루하루가 가기를 기다린다.
합격자 발표는
전화 ARS로 확인이 가능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가지를 않는다.
잠시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여기저기서 맞선 자리가 들어오고
그중 예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사람처럼 살고 싶다.
12시가 되어 합격자 발표 시간이 되었다.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본다.
발신자가 몰려 통화가 되지를 않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돌린 후에야 겨우 통화가 연결되었다.
"135번
합격자 명단에
..."
"없습니다."
멍했다.
허탈했다.
머릿속 꿈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믿을 수가 없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시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
134번을 조회해 본다.
"134번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하는 김에
136번도 조회해 본다.
"136번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조금 위안이 됐다.
그때 내 앞뒤에 앉았던
사람들 모두 떨어졌다.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다.
조용히 내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적막감과 어둠만이 남았다.
당분간 결혼할 생각은 접어야 된다.
다음날
병원에 출근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다시 반가웠다.
원장에게 고분고분해지고
병원 일도 더 열심히 한다.
그렇게 시험을 봤는지 안 봤는지
조용히 잊혀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