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oration Earth
그냥 질렀다.
지구에 보호보드 기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불어 버렸다.
일단 그런 게 있다고 지르고 찾아봐야지. 지구의 보호모드 function key, 어딘가에 있겠지.
<지구의 역행>, 앞으로 가야 하는 글의 여정이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만 그냥 가보기로 했다. 수풀로 뒤덮인 산길도 걷다 보면 길이 보이고 가다 보면 어디론가 다다르겠지. 가다가 길을 잃으면 산 길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의 이야기가 되고 우연히 발견한 샛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만 아는 별천지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여백이 있고 줄기가 있는 뼈대 있는 글만 썼지만 나도 사고의 흐름에 따라 손 가는 대로 쓰는 글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소설가들은 자신의 사유가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자랑하기 위해 여백하나 없이 빽빽하게 글을 쓴다. 내가 못 써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이런 글은 읽는 독자들에게 민폐라고 생각한다.
빽빽한 문장으로 사유의 깊이를 과시하기보다는 여백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자리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방향이다. 독자가 읽기 쉽게 넓게 넓게 쓰는 글이 진정한 글쓰기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글에 여백을 두는 건 다 글의 장치적 미학이고 의도적으로 설계한 거였다는 말이다.
그래도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내일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구의 역행>으로 가는 글의 여정에 정신줄을 바짝 잡고 걸어야 하겠다. 그런데 정말 지구에 보호모드라는 게 있을까? 그래도 일단 지르고 보니까 왠지 지구의 숨겨진 기능 같은 게 있는 것 같은 그럴싸함이 글의 포문(砲門)은 확실하게 열어젖힌 것 같다.
지구를 파멸시키려는 안드로메다의 군단에 맞서기 위해 폭포수가 흐르던 폭포에서 갑자기 동굴이 나오고 동굴에서 마징가 제트(Z)가 물속에서 솟아오르더니 북한의 icbm 미사일처럼 물속에서 솟구쳐 올라서 지구의 적들을 무찌르고 지구를 구해줄지도 모르잖아.
컴퓨터 수리기사가 컴퓨터 이상 증세를 진단하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있다. 컴퓨터 자체에 남은 로그 기록을 살피는 일이다. 컴퓨터의 기록 저장 장치에는 컴퓨터의 버벅거림, 화면의 멈춤, 운영 체제의 이상 신호가 모두 로그로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의 로그를 먼저 뒤져 봐야 할 것 같다. 지구의 로그는 사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구의 빙하에 남은 흔적과 퇴적층에 쌓인 기록들은 생각보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 기록이 지워지지 않고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 장치도 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지어지던 때의 시작 기록입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손수 빚어 만드신 그날의 생생한 역사이자, 이 행성의 첫 번째 로그(Log)입니다."
창세기 2장 4절에 보면 행성의 로그의 첫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번역은 "이것은 땅과 하늘의 역사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 '역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톨레도트(תּוֹלְדוֹת)이다.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세대(世代)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이것은 땅과 하늘의 세대(世代)이다."가 정확한 원래의 의미이다. 물리적 하늘과 땅에 세대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세대에 대한 로그는 사실 지구에 대한 로그가 아니라 지구에 인간이 거하게 되면서 시작된 인간 세대에 대한 로그(log), 즉 기록이다.
그런데 인간 세대에 대한 그 기록 저장 장치에는 분명하게 지구의 보호모드가 작동되었던 로그가 남아있다.
역시 지구에는 보호모드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보호모드가 작동한 대가는 참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