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곰 독자의 요청으로
뭉크 하면 그 해골스러운 얼굴이 패닉에 빠진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림, <The Scream > 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시선을 사로잡은 뭉크의 그림은 바로 <마라의 죽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여자의 나체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한 이 그림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라'가 누구인지 왜 이 그림의 이름이 <마라의 죽음>인지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La Mort de Marat: 마라의 죽음>의 오마주입니다.
원래 그림 속 마라는 프랑스 혁명가 장 폴 마라입니다. 그는 피부병 때문에 욕조에서 집무를 보던 중, 여성 혁명가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찔려 살해당했습니다. 그런데 다비드의 그림 속 마라는 숭고한 순교자였지만 뭉크의 그림 속 남자는 실제 마라가 아니었습니다.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은 뭉크에게 결혼을 강요하며 집착했던 그의 애인 툴라 라르센과 뭉크입니다.
그녀는 권총으로 자살 소동을 벌였고, 이를 말리던 뭉크는 총기 사고로 왼쪽 중지 마디를 잃었습니다.
뭉크는 그 사건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아니 실제로 그러한 죽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해 암살당한 마라를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자신의 경험과 그때의 느낌을 유명한 미술 작품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이 그림의 이름을 '마라의 죽음'이라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이 겪은 부끄러움과 수치심과 신체적 상실을 혁명가의 죽음으로 격상시켜 미화(美化)하려 하거나 적어도 유명한 미술 작품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그림을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개인전이 중단되고 혹평으로 신문에 오르내리자 그는 이보다 더 좋은 홍보수단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상업적으로 의도적인 작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여자의 꼿꼿한 자세와 그에 대비되는 뭉크의 구도입니다.
여자는 무표정하게 아니 실망감을 나타내는 듯한 무표정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뭉크가 그린 다른 그림들을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그림들에서도 한결같이 여자들은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뭉크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에서 뭉크가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자들은 뭉크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여자들의 눈을 보면 뭉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느꼈든 아니든 상관없이 뭉크가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에는 뭉크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먼저 <마라의 죽음> 속에 나오는 툴라 라르센을 보면
그림 속 여자는 누드이지만 전혀 관능적이지 않습니다.
이 여자의 누드에는 내가 저 여자의 몸이 뭐라고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느껴집니다.
그가 그린 이상적인 여성 마돈나의 포즈와도 대비가 됩니다.
그건 뭉크가 그 여성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여체는 차갑고 딱딱합니다. 뭉크는 그녀의 몸을 아름답게 그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라의 죽음> 속 여자의 얼굴은 그리다 만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대상을 세밀하고 정성 들여 표현하게 하지만 대상에 대한 혐오나 거부감은 그리다 만 것처럼 뭉뚱그려 표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억하기 싫고 만나기 싫고 아무튼 싫은 사람은 가끔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거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아마 뭉크는 툴라 라르센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거나 그녀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뭉크가 그린 <재>에 묘사된 헤이베르그 밀리나 <마라의 죽음> 속 툴라 라르센과 같은 현실 속 여자들은 모두 꼿꼿하면서 표정에 실망감, 분노, 지배적인 위치에서의 강요와 같은 감정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이상적인 여성형인 마돈나의 그림은 포즈가 관능적이고 뻣뻣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상형인 여자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요구도 평가도 하지 않는 여자, 그런 여자는 사실 죽은 상태여야 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자신이 흠모하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순간은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뭉크를 똑바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는 사춘기 소녀입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소녀는 앉아 있습니다.
유일하게 뭉크가 지배적인 위치에서 내려다볼 수 있고 편안하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여자는 사춘기 소녀입니다.
뭉크는 사춘기 소녀에게서만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여자 앞에서 위축되고 자신감이 결여된 그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사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가 위안을 얻고 의지하고 싶었던 헤이베르그 밀리와의 성적 관계에서 얻은 트라우마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뭉크는 헤이베르그 밀리와 관계 후에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상처를 남겼고, 나는 그녀의 육체 안에서 길을 잃었다."
그가 그녀가 떠난 후 상심해서 여자에 대한 혐오와 여자를 착취하는 주체로 묘사한 것을 보더라도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심리는 그에게 심인성으로 남성 기능에 문제를 일으켰을 수 있으며 그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 것과 그의 연인들이 결국에 경쟁자 남성에게 간 것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만을 보고 단편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판단하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그의 그림과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림을 바라볼 때 그림 속에 화가의 마음을 보려 한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화풍, 색감, 붓터치 등에서도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쯤 해서 그림의 감상을 마치고 그림에 담긴 더 많은 의미들은 그림을 바라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