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면접

다시 쓰는 인턴일기

by 아반


만년 인턴으로 생활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병원을 개원할 엄두도 집안의 지원도 사실상 없었고

사실은 용기가 더 없었고...


병원에서의 생활은 앞이 보이질 않았다.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점심을 먹는 샐러리맨들이 부러웠다.

나도 넥타이에 정장을 입고 출근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만 갔다.


그래서

병원 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차가운 길바닥으로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매일 구인란 게시판을

보면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두세 곳에 면접을 보고

또 두세 곳에 지원서를 냈다.


그중 한 곳은

그레이 하운드 경주견을 경마처럼

운영하겠다는 회사였는데

도박 사업이라

면접에서 내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으니

잘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은

반려견 출입국을 도와주는 회사였다.

역시 새로 생긴 곳으로

찾아가 보니

오피스텔 303호에 직원들 7~8명이

컴퓨터 앞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고

같은 오피스텔 306호에 사장실이 있었다.

사장실 소파에 앉아 면접을 봤는데

사장과 부장 모두 사기꾼들 같았다.

마침 그날 전직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한 여자가

채용되어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주고 왔는데

갈 마음이 없었고

괜히 내 정보를 유출시킨 것 같아 찜찜해서

다음 날 다시 찾아가

이력서를 돌려 달라고 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회사 이름을 검색해 보니

직원들이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해서

아우성이었고

사장은 전과가 있는 사기꾼이 맞았다.


그리고

동물약품 업체에도 지원서를 냈었는데 떨어졌고

(이때 이 회사에 합격했던 사원은 나중에 우리 동물병원에 물건을 팔러 왔었다.)

또 다른 회사는

입사 조건이 까다로워

토요일 오후에

회사 로비에 갔다가

회사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이때 이 회사에 합격했던 사원은 나중에 우리 회사에 물건을 팔러 왔었다.)


정말로 병원 바깥은

차가웠다.

이제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고

이대로

30대, 40대가 되어

영원한 백수로 남을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던 중

한 기업에서 1차 서류 심사에 합격됐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면접은 2차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실무자들과 우선적인 면접이 있었고


며칠 뒤

3차 면접에서 회사 임원과의 면접이 있었다.


3차 면접을 보러 가니

먼저 적성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때 인사부 담당자가

이사님이 영어 면접을 볼 수도 있으니 준비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순서가 되어

면접실로 들어갔다.


이사님은

회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를

한국말로 물었고


영어만 생각하고 있던 나는

허를 찔리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



흡사 라디오 방송 사고가 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를 않았다.

이사와 멀뚱멀뚱 눈만 마주 보고 있었다.

뻘쭘해서 웃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얼어 버렸다.


머릿속에 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얀 설원을 향해 영화 <러브레터>의 여배우가 오겐키데스까? 를 외치고 있었다.)


이 침묵을 못 견딘 쪽은 오히려

인사부 쪽이었고

부장은 나에게 가축 부검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동물병원에서 한 번도 가축을 접해 보지 않았으나

나는 머릿속으로 개 사체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그것이 마치 돼지라도 되는 양 가축 부검에 자신을 보였고


결국 실무자의 필요와 요구로 인해

침묵의 지원자는 최종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회사라는 곳은 정기적으로 직원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세뇌 교육을 시켜 애사심과 충성심을 주입시켰고


입사 6개월 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사원 교육

마지막 시간은 바로 이사님의 특강이었다.


이사님의 특강이 있기 바로 전 쉬는 시간에

나는 복도를 거닐다가

신입사원을 뽑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우수 인재를 뽑는다는 글과 함께

석사 학위 소지자 우대라는 자격 조건을 보게 되었다.


이사님은 마치 대통령 각하처럼

교실에 들어오셨다.

직원들은 엄청난 귀빈이 오신 것처럼

예를 갖춰 이사님을 맞이하였고

교육생들은 정자세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사님은 우수 인재에 대해 특강을 하셨다.

나는 '이 회사가 바라는 우수 인재란 고작 석사 학위 소자자란 말인가?'라고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사님이

나를 호명하며


"당신은 어떤 인재가 우수 인재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근엄하게 물으셨다.


머릿속에는 '석사 학위 소지자'가 맴맴 돌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이사는 그제야

나를 기억하는 듯하며

깜짝 놀라는 눈치였고

교육생들은 숨죽여 내가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직원들도 마치 방송 사고가 난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열정과 패기로 탐구하고 끝없는 반성과 자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뭐 이런 류의 틀에 박힌 뻔한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이미 버스는 떠나고

다른 교육생이 그와 비슷한 대답을 했는데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톡 까놓고

'니들이 원하는 인재는 석사 학위 소지자 아니었어?'


이사는 그 '침묵의 빌런'에게

두 번이나 당한 것 같은

뭔가 이상한 찜찜함을 느꼈는지

나에게

한자가 많이 섞인

원고를 건네며

큰소리로 읽어보라고 했다.


다행히

대학 때 보던 책들은 원서 빼고

전부 한자투성이었고


이사 눈에 무식해 보이고 생각 없는 놈이었겠지만

유창하게 한자어를 술술 읽어갔다.

이사는 숨을 죽이며

속으로 '틀려라', '틀려라' 하고 있었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이사와 기싸움을 했던 것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회사는 꼭 공산당 같았다.


별 것도 아닌데

서열만 층층이고


이사 별 거 아니었다.




13화 [인턴일기 13] 수상한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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