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녀를 좀 더 알았더라면...

다시 쓰는 인턴일기

by 아반


인턴일기...

회를 거듭할수록

아름다운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데

그렇다고 억지 춘향으로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자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기록,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과 성장, 가슴 따뜻한 순수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보람과 생명의 소중함.

이런 걸 쓰고 싶다.


그런데

내 기억의 저장소를 아무리 뒤져도

쓸만한 게 없다.


없을 리가 없는데

그 많은 환자들, 치료한 시간과 케이스가 얼마나 많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기들은 3살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3살 이전의 기억은 무의식의 저장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3살이 지나야 비로소 의식의 세계에 기록되기 시작한다.


아기들이 기록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문자 형태의 글을 쓰지 못하는 아기들이

텍스트 형태의 기록을 두뇌에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지 파일이나 소리 파일로 혹은 센서의 파형 형태의 기록이 어딘가에 기록될 수 있을 뿐이겠지.


그래서 아기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아기들은 많은 걸 기억하고

그 기억의 지배를 받아 성격이 형성되고

때로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소중한 나의 임상 경험들은 바로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떠올릴 순 없어도

지금도 환자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어떤 프로토콜로 치료할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걸 보면

인턴 시절에 놀면서 시간을 낭비한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턴 시절 환자를 치료하면서

대면했던 많은 여자들은 의식의 저장소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기하게도 남자들은 또 무의식에 저장했나 보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여자들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녀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분명히 개를 데리고 왔을 것이고

우리는 분명히 그 개를 치료했을 것이다.

개와 치료는 무의식에...


그녀는 다리가 가늘고 예뻤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때로는 망사 스타킹을 신기도 했던 것 같다.

매번 항상 몸에 꼭 붙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는데

그냥 미니가 아니라 짧은 미니 스커트였다.


하지만 절대 천박하거나

싼 티가 나는 그런 건 아니었다.

동물병원엔

'나가요' 언니들도 많이 오지만

그녀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짙은 블랙 계열의 의상을 잘 갖춰 입는 편으로

구두는 고급스러워 보인다.


화장을 단정하게 했고 얼굴도 세련되고 멋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얼굴로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얼굴이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저장된 얼굴 이미지 파일이 일부 깨진 것 같다.

하지만 쭉쭉 잘 빠지고 예쁘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 그녀가 한 번은 캐나다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나에게 선물을 줬다.


금 도금한

아니 그냥 금색 금속으로 된

양장본 책갈피였다.

그래도 싸구려는 아니다.

근사한 편이다.


지금도 두꺼운 원서 'kirk’s current therapy' 최신판에 꽂혀 있다.


책에 꽂으면

책의 옆면,

그러니까 책장에 꽂아 놓았을 때

책의 얼굴 부분에

멋있는 사각형 장식에 캐나다 단풍잎 문양이 보이는 그런 책갈피였다.


고마웠다.

조금 설레기도 하고.


그리고 얼마 후

저녁 늦은 시간에

병원에 그녀가 찾아왔다.


시간이 있냐면서.


그건 만나줄 수 있는지 물어본 건데


그때 나는 그냥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는 걸로 들었고


이웃집 아줌마가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와

"총각 시간 좀 있어?"

이렇게 물은 걸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 지금 시간 있어요."

라고 말해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이웃집 아줌마처럼

그냥 병원

휴게실 의자에 앉게 되었다.


허접한 병원 휴게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이 마주 앉으니

할 말이 없었다.


시시콜콜한

가족관계를 묻고

별 얘기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순둥이죠?"


라고 말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내 모든 정신세계를 간파당한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나 얕은 인턴의 정신세계


밖에서 볼 때

넓고 푸른 호수 같았는데

발로 밟아보니 첨벙거리는

고인 물이었다.


그렇게

종이컵에

차를 나눠 마시고

병원을 나서는 그녀에게

조심해 가시라고

밤길 조심 하시라고


집까지 바래다줄 수도 있었는데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어딘가 나갔다가 병원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원장이 진료대 위에서

분주하게 있었고

누군가가...


우는 건가?


그녀가 울고 있었다.


사고로 다친 개를 병원에 데리고 왔지만

너무 크게 다쳐서

손 쓸 수가 없었다.


우는 그녀가 병원을 나간다.


따라가 보라며

병원 식구들이 등을 떠민다.


내가?


난 그녀에게 아무도 아닌 것을...


그래도


따라가

그녀를 붙잡고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또다시

잘 있으라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누군가 기쁠 때

같이 기쁘고

누군가 슬플 때

같이 슬퍼할 줄 알았어야 하는 건데...


그때,

내가 쭉쭉 잘 빠진 그녀의 외모만을 보지 말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궁금해했다면...



그때,

그렇게 쭈뼛쭈뼛하지는 않았을 텐데...




11화 [인턴일기 11]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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