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본에 취업했던 이유 (19화)
홋카이도도 서서히 더운 여름의 시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한국만큼 습한 더위는 아니었지만, 고위도 지역 특성상, 태양 자외선이 굉장히 셌다.
한낮 기온이 38도까지 올라갔던 수준이었다.
차단 성능이 가장 좋다는 썬크림을 매일매일 바르고 다녔지만, 자외선 때문일까,
생전 한번도 나지 않았던 주근깨가 생기기도 했고, 자연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탈색되어 주황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겨울 철 아침 9시에 뜨고 오후 4시면 지던 해도, 여름이 되자 새벽 3시 40분에 뜨기 시작했다.
이직 면접 제의가 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본 온 뒤로는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사람인 앱에서 알림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한 일본계 기업에서 면접을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었다.
알고보니, 내가 사람인에 올려두었던 이력서를 깜빡하고 내리지 않았었는데, 기업 인사담당자님이 그것을 보고 연락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해당 기업은 연 매출 1조 수준의 꽤나 규모가 큰 기업이었고, 특히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필수 소재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업계 종사자들은 말만 하면 알 기업이었고, 디스플레이 이외에도 각종 화학 소재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그룹사였다.
(대학 교수님도 직장 생활 시절 같이 일했던 기업이었다고 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연락 받았던 회사는 내 대학 전공을 살려 더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것 같은데.. 면접을 보는게 맞을까?
지금까지 배웠던 일본어를 잘 써먹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곤 하지만, 지금의 회사에서도 앞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은데..'
고민 끝에 우선 면접을 보기로 결정하고, 인사 담당자님께 메일을 보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해, 1차 면접은 ZOOM 화상 면접으로 진행했다.
회사에는 유급 휴가 (연차)를 내고 면접을 보기 위해, 앱을 통해 삿포로 역 앞에 위치한 한 회의실을 2시간 정도 대여했다.
텅 빈 회의실에 양복을 차려 입고 앉아서 면접 시작 30분 전 ZOOM에 접속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인사 담당자님으로 보이는 분이 화면에 나타났고, 이렇게 말하셨다.
"유빈씨, 잘 들리세요? 면접 진행 전 사전 체크할게요."
한 30분 정도 지나고, 드디어 면접이 시작되었다.
1차 면접에는 한국인 면접관 1분과 일본인 면접관 1분, 그리고 인사담당자님 이렇게 총 3:1로 면접을 진행했다.
일본인 면접관도 계시고, 일본어를 써야 하는 직무 환경 특성 상, 면접은 전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인 면접관 분이 질문을 3차례 정도 하셨고 (자기소개, 지금 하고 있는 업무가 무엇인지, 왜 일본에 취업을 했던 것인지?), 그 후 일본인 면접관께서 질문을 하셨다.
40분 간 면접을 보며,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마치 내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코엑스에서 보았던 홋카이도 회사의 면접이랑 느낌이 판박이었다는 점이었다.
전공 지식에 대한 빠삭함의 여부, 혹은 스펙이라 불리는 본인 역량을 중요시하는 한국 기업들과는 다르게,
일본 기업은 면접 때 이 사람의 인성, 잠재력, 성향 등을 주로 보는 경향이 많다.
전공이 어찌되었던지 간에 이 사람이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짜피 회사에 들어와서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면접을 보았던 이 회사도 똑같았다.
1차 면접 당시 일본인 면접관께서는 이렇게 물어보셨다.
"대학교 당시 이러한 캡스톤디자인 프로젝트를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문제해결을 했나요?
그 후 배우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느끼나요?"
나는 아무리 일본계 기업이라고 해도, 전공 지식을 물어볼 것 같아 디스플레이 관련 전공 지식들을 여러 차례 뒤져보고 공부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사실, 대학교 때 배웠던 디스플레이 공학 과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던 분야였기에 공부도 소홀히 했을 뿐더러, 다 까먹은 상태였기에 걱정했었다.)
나는 2019년 코엑스에서 보았던 면접 당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대학 시절, 그리고 지금 회사 생활에서 느끼고 배웠던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덕분에 편하게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떨리고 긴장했지만, 그 긴장도 얼마 안가 풀리더라.
당시 회의실의 와이파이 환경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화질이 좋지 않았기에 면접관 분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렇다보니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캉나무
얼마 안가 메일로 1차 면접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2차 면접은 대면 면접으로 해야 하지만, 나는 일본에 있는 환경 상, 2차 면접도 화상 면접으로 진행했다.
2차 면접에는 1차 면접 때 뵜던 분들을 포함하여 일본인 면접관 2분, 한국인 면접관 2분, 한국 지사 사장님, 인사담당자님 이렇게 6:1로 진행되었다.
역시 같은 회의실을 빌려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은 총 50분 정도 진행되었다.
1차 면접과 동일하게 역시나 화질은 좋지 않았고, 면접관 분들 누가 누군지도 모를만큼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기에,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질문은 다양했다. 한 10개 정도의 질문이 오고 갔다.
"대학교 때 화학공학을 전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무엇인가요?"
"일을 할 때 중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일본인 면접관께서 말씀하셨다.
"대학 재학 시절 교보문고에서 일본인 할아버지를 만나 도와드리고 인연이 계속되었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믿기지가 않는데,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요? 지금도 연락하고 있어요?"
(이 분은 이직 후 내가 소속되었던 부서의 부장님이셨다. 지금은 일본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그 분은 새벽에도 일하실 만큼 꽤나 워커홀릭이었고, 능력이 넘사벽이신 분이었기에, 일본 본사로 넘어가고 얼마 안되어 부장을 달았다. 일본에서 부장급이면 사업부장 바로 밑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또 그 때의 썰을 신나게 풀었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인연을 통해 내가 일본에 취업할 수 있었던 동기가 되었던 건 아니었을지, 만일 그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어쩌면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인연의 소중함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보문고가 강남에 있었는데, 내가 면접에서 '강남'이라는 지명을 일본식 발음인 캉나무 (カンナム)로 발음했었는데, 당시 한국인 면접관 한 분이 크게 웃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이직을 하고, 알고보니 이 분은 내 파트장 되실 분이었다. 입사 후 파트 회식 때 그 분과 술 한잔 하며 슬쩍 여쭤봤다. 알고보니 면접 당시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현지인처럼 발음해서 놀랐다고, 그래서 웃었다고 하시더라.)
이 후 면접에 합격하게 되었고, 다니던 홋카이도 회사에는 죄송하지만 퇴사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부장님이 입사 선물로 주셨던 TV는 사무실 창고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새로 올 또 다른 후배가 사용하기를 바라며.
사택에서 짐을 정리하고 인사 담당자님과 퇴사 일정을 협의하고 퇴사했다.
오래간만에 밟는 고향 땅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은 8월 6일 밤이었다.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삿포로에서 바로 한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었기에, '삿포로 -> 나리타 -> 인천' 순으로 비행기를 끊어 탔다.
당시 에티오피아 항공 (ET)이 정말 쌌었기에, 그걸 타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를 타기 전, 예전 대학 시절 강남 교보문고에서 만났던 인연이신 카노 할아버지께도 전화로 인사를 드렸다.
"카노 선생님, 한국가서도 열심히 할게요.
다음에 다시 얼굴뵈러 와카야마에 놀러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건강히 지내시구요."
2주 간의 자가격리
비행기를 타고 약 1시간 반을 날았을까? 서서히 서울과 인천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착륙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2주 간 자가 격리가 필요했었기에, 고향에 도착하고 아침에 보건소에서 RAT (신속항원검사)를 받고 음성인 것을 확인하고, 자택으로 이동했다.
자택에서 2주간의 격리 생활이 시작되었고, 집에서는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디스플레이 업계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때로는 심심할 때마다 일본에서 만났던 한국인 친구와 전화 통화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일 지났을까?
집 앞으로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알고보니 코로나19 지원품이었다. 박스 외관에는 ‘코로나19 함께 이겨냅시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내부에는 수많은 음식과 생필품들이 가득했었다.
홀로 사는 분들께는 이런 지원이 한줄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 정부에 감사함을 느낀다.
하루에 5번 정도는 건강 상태, 체온 등을 방역당국에 보고해야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길고 긴 자가격리가 끝나고,
2021년 9월 1일, 새로운 직장에의 입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편의 마지막 화인 다음 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