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본에 취업했던 이유 (20화, 마지막화)
짧았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일본 홋카이도 생활.
1화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처음 가봤었다.
그때 당시 내가 일본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 그리고 대학 생활동안 만났던 인연들 등.
그런 하나하나의 사소한 것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나는 나중에 일본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라고 결심하게 만들어 주었고, '난 일본에서 취업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내가 일본에 취업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인성과 잠재력을 중시했던 일본 기업
내가 지원했던 회사는 본인의 역량, 스펙과 전공 지식에 대한 빠삭함을 중요시하는 한국 기업과는 다르게,
지원자의 인성, 잠재력을 더욱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컸다.
그렇기에 신입 사원 면접 때에도, 전공 지식에 관한 질문보다는 본인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을 느끼고 배웠는지에 대한 부분을 물어본다.
거짓말로 본인을 포장하려는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해서 검증해내니, 리플리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쉽게 판가름 난다.
OO직무, ㅁㅁ직무로 나누어 채용하는 우리나라의 기업들과는 다르게,
보통의 일본 기업들은 '종합직'이라는 이름으로 채용을 하고, 입사 이후 신입사원 교육 때에 이 사람의 성향, 역량 등을 보아 적재 적소에 맞게 부서 배치를 시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례로 나의 후배 중,
비록 말빨이 좋진 않지만 공구를 어릴 때부터 사용해와서 능숙하고, 소리만 듣고도 이게 대충 어떤 부품에서 문제가 있는 건지를 아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교육 이후 정비센터에 배치되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라인으로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요 녀석 이번에 해당 지역 정비 실적으로 1위 했다고 하더라. 대견스러웠다.
(2위랑은 분기에 한화 1,000만원 정도 실적 차이가 날 정도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잠재력을 본다는 것은 '이 사람을 성장시켜 어떤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낼 수 있을까'를 장기적으로 보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내가 다녔던 회사는 우리나라처럼 ‘4년제 학사 학위 이상’ 등의 학력 제한 사항이 없었다.
고졸이던 대졸이던 기본 급여 차이만 날 뿐, 능력과 역량, 성향만 맞다면 설계도 물론이고 어떠한 부서에서도 일할 수 있었다.
철저한 신입 사원 교육, 그리고 체계화
내가 다녔던 홋카이도 회사는 신입 사원 교육만 자그마치 6개월이었고,
(물론 나는 코로나19로 인한 입사 지연 사정으로 특이 케이스이긴 했다.) 공구 하나 다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나중에는 농기계 분해, 조립까지 가능하게 만들 수준으로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빨리 빨리' 보다는 '천천히 느려도 괜찮지만, 하나 배울 때 똑바로 배워라.'라는 사고 방식인것이다.
나도 교육을 받을 때, 처음 들어보는 공구에 실수를 하고, 때론 혼동되서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교관님께서는 몇 번이고 이해 될 때까지 시범을 통해 가르쳐주셨다.
해결방식보다는 원리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컸었고,
실제로 콤바인 구조에 대해 교육받을 때에는, 콤바인이 작동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이 부품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그리고 그 부품을 빼버리고 작동시킬 때에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배웠다.
(기계의 모든 부품은 다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설치된 것이기에.)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농기계를 판매하고 정비하는 사업이 꽤 컸었기에,
'농기계를 타는 농부는 곧, 우리 고객이다. 따라서 고객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고객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된다.'라는 관점에서 회사 부지 내에 있는 땅을 내가 직접 갈아보기도 하고, 그곳에 트랙터와 작업기를 가지고 감자와 채소를 직접 심어보는 실습 교육도 받았었다.
당시 교관님께서 하셨던 얘기가 있었다.
"임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처음에 기둥이 필요하지? 근데 그 기둥이 튼튼하지 않으면 그 건물은 어떻게 될까? 무너지겠지? 이것도 마찬가지다. 너가 기초를 제대로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나중에 무너질테니까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물어보고 수정하도록 해."
처음에는 잡고 돌리기 조차 어려웠던 공구들이 나중에는 손에 익고 익다보니 몸에 익숙해졌다.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 가득찼던 처음과 비교해보면 '맡겨주십쇼.'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한 지 벌써 3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지금 나에게 작업기 조립을 하라고 하면 나는 아직까지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한 가족과도 다름 없었던 부서원들
마지막 이유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일본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어쩌면 한 가족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부서의 사람들은 처음에 내가 실수하거나 잘 못하더라도, 기다려주고, 몇 번이고 가르쳐주고 했었다.
마치 선후배 관계를 장기적으로 보는 느낌이었다고 해야할까.
하나의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를 질타하거나 관계를 칼로 그어버리는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왜 그 친구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원인, 그리고 그 친구가 그렇게 하려고 했던 의도‘를 이해하려고 했던 성향이 강했다.
(이는 ‘미움받을 용기’에서 박사가 얘기했던 내용과 얼추 비슷하다.)
당시 과장님이 얘기하셨던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이 있다.
"임군, 누구나 처음엔 실수하고 못하는 법이야. 나라고 처음부터 완벽했겠어?"
나는 이러한 일본 기업 문화에 굉장히 많은 감흥을 느꼈고, 이것이 나의 가치관 변화에 큰 기점이 되었다.
앞으로 썰을 더 풀 예정인 차기 회사에서도 나는 후배들의 실수와 부족함을 혼내기 보다는 커버쳐주고,
뒤에서 이해가 될 때까지 가르쳐 주었는데, 후배들 성장을 위해서도 이게 맞는 것이더라.
머리가 많이 나쁜 친구라도, 급할 것 하나 없이 차근차근 알려주면 다 따라온다. 그 때를 기다려주는 것 뿐.
사람마다 자라온 배경과 환경이 다르기에, 이해력과 성장 능력, 그리고 급성장하는 시기가 다른 것은 기정사실이었기에.
부장님은 당시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3살 정도 어리실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았던 분이셨고,
과장님은 삼촌 뻘 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부장님이 날 아들같이 대해주셨던 건 아니었을 까 싶긴하다.)
부서원이 실수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연락 한번 하면 바로 현장에 찾아와주셨던 분들이셨다.
(가령, 시공 관리 때 잘못 설계했던 도면으로 시공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갈아엎으려면 막대한 비용 손실이 나게 되었는데, 과장님께서 현장에 오셔서 고객과 직접 얘기하여 도면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었던 적이 있었다.)
선후배간 상담 연락이 활성화되어 있던 회사 환경 상, 사무실에서 과장님의 전화는 3분에 한번씩 울릴 정도였고, 현장에 나가 있거나 출장을 가 있는 부서원들의 연락 및 상담 사항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답해주셨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부장님, 과장님 세대에는 회사 차에서 자며 대기할 정도로 업무가 빡셌다고 하더라.
그런 역경들이 있었다 보니, 실무진들의 애로사항을 다 이해하시고 계셨던 것 같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부서는 당시 프로젝트가 크게 4개로 나뉘었었다.
따라서 그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담당자들도 각기 달랐는데, 어떤 담당자가 업무 과다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가한 부서원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러 가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 일이 아니었지만, 서로 돕고 도왔던 것이었다.
"임군,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우리 부서 매출도 올라가는게 이치라고 생각해.
자기혼자만으로 해결 안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부서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돕는다는 것이 이상적인 조직이 아닐까.
그래서 난 친구들에게 일본 회사 생활 당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한 배에 탄 선원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했었다.
내가 일본 취업을 위해 도전했던 당시, 그리고 일본 현지에서 생활했던 당시, 그리고 귀국까지의 스토리를 지금까지 20화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앞으로도 이어질 스토리를 기대해주셨으면 한다.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