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2막, 여긴 일본인가 한국인가? (4화)
내가 다니던 회사 그룹은 매년 4월에 새로운 결산 년도로 넘어갔고, 그에 맞추어 해당 년도의 사업 계획이 구성되는 형태의 전형적인 일본계 회사였다.
그룹사는 여러 가지 사업부로 나뉘어져 있었고 (한국 지사는 디스플레이 사업부에 속한다.),
매년 1번씩, 전 세계 89개 지사 임직원들이 'Innovation Challenge'라고 하는 신사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발표하는 이벤트에 참가했다.
물론 한국 지사에서도 각 부서 별로 여러 팀이 참가했었고, 당시 내가 있었던 부서에서는 10개 안되는 기획안이 나왔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일본인 부장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빈, 기획안을 깔끔하게 잘 정리했네.
너 기획안이 마음에 들어서, 부서에서는 너를 내보낼까 생각중인데 어때?"
이 이벤트의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부서에서 올라온 프로젝트 기획안 중 1개의 기획안을 뽑고, 각 부서의 기획안 중 한국 지사를 대표해서 나갈 1개를 뽑고,
그 기획안을 가지고 다시 전 세계 그룹사에서 겨루는 일명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최종 우승을 하게 되면, 그룹의 다음 년도 신사업 아이템에 포함되어, 기획자가 실제 일본 본사로 넘어가서 몇 개월 정도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역할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생각치도 못했던 부장님의 선택에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한국 지사 전체의 프로젝트 발표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당시 냈던 아이디어는 '농기계 오염 방지 점착 필름'이라는 아이템이었다.
예전 일본에서 다니던 농기계 회사에 있을 때, 농민들에게 항상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이놈의 골치투성이 진흙'이었는데,
진흙이 뒤덮인 논밭에서 장시간 작업하는 특성 상, 농기계들은 세차를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진흙 오염물들에 항상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농기계 정비소에서 세제를 섞은 뜨거운 고압수로 뿌려내야 간신히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룹사의 보유 기술을 농업 분야에 응용하여, '애초에 농기계에 진흙이 달라붙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는 필름이나 점착제를 개발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휴대폰에 붙이는 지문 방지 필름이나, 자동차의 발수 코팅과 같은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 대학교 졸업 캡스톤디자인 프로젝트 때가 떠올랐다.
경제적 이윤이 얼마나 나올지, 제품 수율이 얼마나 나올지, 사업 타당성이 있는지 실제로 구상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국 지사 발표
한국 지사 발표에서는 해당 아이템에 대한 소개와 해당 분야의 동향, 문제 해결을 위한 개선책, 향후 방향성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얘기했는데, 임원 분들과 사장님, 그리고 각 부서에서 채택된 기획안을 프레젠테이션 할 각 팀원들, 총 40명 가량이 참여했다.
내 발표가 끝난 후 무서운 질문들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농기계와 현재 그룹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기술에 관한 간단한 몇 가지 질문들이 있었고, 그렇게 발표는 끝이 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질문이 너무 적어서, 다들 별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하고 마음을 비우고 기존 업무에 초점을 돌렸다.
그 날 오후,
생각치도 못하게 나의 기획안은 채택되었고,
마침내 한국 지사 전체를 대표하여 전 세계 나머지 88개의 그룹사와 겨루는 여정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음 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