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2막, 여긴 일본인가 한국인가? (12화)
베트남 출장을 다녀오고 1달이 안된 시점이었다.
당시 한창 가격 협상과 신기종 제품 인증 등의 문제로 인하여 고객사와 회의가 잦았던 시기였다.
고객사 구매 담당자와의 전화 연락은 이전보다 잦아졌고, 가격 협상으로 인해 방문 회의는 주에 1번씩 있었다.
당시 우리와 함께 일하던 고객사의 구매 담당자는 3명이었는데,
한 명은 양산 제품 담당자였고, 다른 한 명은 개발 안건 담당자, 마지막 한 명은 총괄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총괄을 담당했던 고객사 구매 담당자 분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대면 회의 때 처음 본 나를 보고 물어보았다.
"유빈 씨는 고향이 어디에요? 나이는 어떻게 되요?"
대면 회의가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파트장님께서 나를 또 다시 부르셨다.
"이번에 고객사 구매 부서쪽에서 일본 본사를 방문할 예정에 있는데,
통역이랑 의전 차원에서 우리도 같이 방문하기로 했다. 같이 가자."
회사 담당 여행사 쪽에 문의를 넣어서, 해당 일정에 맞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파트장님께 명확하게 정보를 듣진 못했지만, 최근의 상황 그리고 1박2일의 짧은 출장 여정을 보았을 때, 아마 이번에 일본 본사로 방문하는 목적은 제품 관련 가격 협상이 주를 이룰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만났던 일본
1달 만의 해외 출장.
8시 45분 비행기였기 때문에, 새벽 4시 30분 경 일어나 씻고 준비를 하고,
캐리어 하나를 끌고 5시 35분 인천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새벽이었지만 절반 정도의 사람이 탔고, 다음 정류장에서 파트장님이 타는 것을 보고서야 피곤함을 뒤로하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인천 송도를 지나 버스는 바람이 많이 불던 인천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들이 보였고, 얼마 안되어 공항 1터미널에 도착했다.
(Flightradar24 앱을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날라다니는 항공기의 출도착지와 기종, 속도, 고도 등의 정보를 전부 볼 수 있다.)
아시아나 카운터에서 티켓팅을 마치고, 은행에서 엔화로 환전을 한 뒤, 바로 출국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른 아침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었고, 5분도 채 안되어서 게이트로 들어오게 되었다.
(인천공항 1터미널 출국장에는 별도 입국심사관이 있지 않아, 무인 인식 기계로 진행한다.)
파트장님께서는 일본 본사 담당자들을 위해 면세점에서 한국 과자 등 선물을 준비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우리는 게이트 바로 앞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용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서, 게이트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 때 같이 동행하기로 했었던 고객사 구매 담당자였다.
알고보니 마침 같은 비행편이었기에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그 분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번 여정은 인천에서 후쿠오카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고, 후쿠오카 하카타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일본 본사 사업부 공장으로 이동하는 루트였다.
비행기에 탑승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탔던 오른쪽 창문 밑으로 회사가 있었던 평택 전경이 펼쳐졌고,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비행기는 후쿠오카 상공에서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가 착륙한 뒤, 입국 심사를 빠르게 끝내고 택시를 타고 후쿠오카의 최대 역인 하카타역으로 이동했다.
일정 상 점심 먹을 시간이 없었기에 역에서 파는 도시락 (에키벤, 駅弁)과 생수 한 병을 사서 신칸센에 탑승했다.
(당시 2시간 여정이었던 신칸센은 10,880엔 (한화 10만 4천원 수준)이었다.)
신칸센은 후쿠오카에서 시속 250km/h로 달리고 달려 30분도 채 안되어, 큐슈와 혼슈의 경계인 시모노세키 역에 도착했다. (큐슈와 혼슈 사이에는 해저 터널이 있어 모든 기차는 그 터널을 통과해 넘어간다. 심지어 보행자를 위한 터널도 있다. 명탐정코난에서도 나왔던 유명한 배경. 연결된 해저 터널 위의 해협을 '관문해협 (関門海峡)'라고 한다.)
(시모노세키는 2010년, 내가 고1 당시 생애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뎠던 곳이었기에 그 의미는 꽤나 크다.)
이윽고 열차가 다시 출발하고, 아까 역에서 사왔던 도시락을 까서 먹었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 때 자주 즐겨 먹었던 닭튀김이 들어간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며 또 옛날 일본에서 살 때 추억을 회상했다.
홋카이도에는 세이코마트 (SEIKO MART, セイコーマート)라는 독자적인 편의점 브랜드가 있었는데, 당시 그곳의 닭튀김 도시락이 입맛에 맞았었다. 다른 타 브랜드 편의점 도시락보다 반찬이 부실했지만, 그래도 닭튀김 하나 만큼은 끝내주게 맛있었기에 자주 사먹었었던 기억이 있다.
도시락을 다 먹고 잠시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보고 있었던 중이었다.
고객사 구매 담당자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나와 잠시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빈씨는 회사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어요? 지금 직급이 사원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들어온지는 이제 2년 되었습니다."
담당자는 본인도 원래는 엔지니어 출신이었지만, 구매 쪽으로 발령 난지는 얼마 안되어서 모르는게 많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인사와 짧은 대화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갔고, 열차는 얼마 안되어 본사 사업부 공장이 위치한 역에 도착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신칸센의 중간 기착지였던 시골의 한 역에 내려 주위를 내려다보니 산에 둘러쌓인 목조 주택가가 보였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를 들어가니 낯익은 회사 로고가 박혀 있는 공장이 보였다.
못해도 한국 지사 공장 규모의 2배 정도는 되어 보였다.
공장에는 본사 담당자들이 나와 있었고, 곧바로 회의실로 이동하였다.
본사 담당자들 중에서는 한국 지사의 부사장으로 계셨던 분과 사업부장 바로 아래 급 되시는 분, 회사 홍보 담당자 분들이 나오셨다.
회의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간단한 서로의 통성명이 이어졌는데, 우리와 같이 왔던 고객사 구매 담당자께서 일본어로 자기 소개를 했다.
"私の名前はOOです。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제 이름은 OO입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알고보니 고객사 담당자 분은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했었다.
그제서야 일본 본사 분들은 긴장을 푸셨는지, 얼굴에 미소를 보였다.
이윽고 홍보 담당자 분께서는 그룹사 소개와 함께 현재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소재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역시나 예상대로 가격 교섭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가격 교섭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룹사 보안 상 할 수 없기에 양해바란다.)
파트장님께서 통역을 맡았고, 나는 회의록을 작성했다. 정신없이 오가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폭풍이었지만, 핵심 키워드 베이스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고객사 요청에 따라 원자재와 실제 제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실제 공정에 들어가서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생산 관련 관리를 맡는 담당 직원의 인솔하에 방진복으로 갈아입고 수많은 설비들이 돌아가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메일과 Teams로만 받았던 사내 PPT 자료에 나왔던 설비와 기기들을 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이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설명하는 내용들을 클린지에 다 받아적었고,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해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자료 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도 실 공정 모습을 몇번 들여다보니 금방 이해가 되더라.
이래서 기술을 다루는 분야는 실습 OJT가 반드시 필요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무직군에 대해서도, 이러한 OJT 교육을 의무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2시간 정도의 현장 견학이 끝나고 나오니 벌써 저녁 5시 정도가 되었다.
당시 본사에 계셨던 영업 담당자 분 (이 분은 이후 얼마 안되어 한국 지사 주재원으로 발령 나셨다.)과 함께 총 4명이서 저녁 회식을 하러 가게 되었다.
택시를 타고 가며 들었던 것이지만, 나를 뺀 나머지 3분은 똑같이 82년생이었고, 나와 띠동갑이었다.
시내에 위치한 조그만 2층짜리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이자카야였다.
계단을 올라갈 때 삐걱삐걱 목조 주택 특유의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이게 바로 진짜 일본 이자카야 분위기가 아닌가.
간만에 덴푸라 (天ぷら・튀김), 사시미(刺身・회) 등 제대로된 일식을 먹을 수 있었다.
고객사 구매 담당자 분께서도 술을 좋아하는 타입이다보니, 첫 스타트는 맥주로 서서히 시동을 걸고 유명한 일본 사케, 하이볼 등 여러가지를 마셨다.
회식 때에도 가격 협상 및 교섭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나왔기에, 일본어와 한국어가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도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용들을 머리에 기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 술이 들어가야 긴장이 좀 풀리는건지, 나는 고객사 구매 담당자 분께 서서히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었고,
그렇게 기나긴 1차 회식이 끝나고,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신칸센을 타러 갔다.
밤 막차였던 신칸센 코다마호에 탑승해서 약 1시간을 더 달려 역 앞에 위치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고, 세 명이서 남은 2차 회식을 위해 역 근처 식당을 찾았는데, 거의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클로징 타임이 2시간 정도 남은 2층의 한 이자카야로 향했다.
(본사 영업 담당자분께서는 내일 오사카 본사에 미팅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다른 신칸센을 타고 떠났다.)
2차 때에는 생선 구이 등 먹고 싶은 것을 많이 시켜, 일본 사케와 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한국인끼리만 있었던 편한 자리였다보니, 일본에서 일했던 이야기 등 주로 사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새벽이 되어서 가게 문을 닫는다는 점주 분의 이야기에 우리는 자리를 떴다.
호텔에 돌아가기 앞서 근처에 돈키호테가 있었기에, 대학교 친구가 먹고 싶다고 했던 초코송이 과자를 한 뭉큼 사서 나왔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본사 공장 방문
다음 날 아침.
귀국 일이다. 파트장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신칸센을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다.
호텔은 후쿠오카 공항보다 칸사이 공항 (오사카 근처)에 더 가까웠기에, 오사카 공항으로 이동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열차는 신오사카(新大阪)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공항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고 피곤함에 달리는 기차에서 잠을 청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귀국편 비행기에 탑승하여 또 잠을 청했다.
이번 일정은 정말 짧았기에 아쉬웠지만, 1박 2일의 기간 동안 배웠던 것이 정말 많았다.
특히 공정 내부를 실제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음 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