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J 입니다만.
“너 가끔 단호박이야.”
몇 년 전, 신조어에 나름의 일가견이 있는 엄마가 해준 말이었다. 아마도 엄마는 위로나 공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결책을 내밀었다. 정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조언이었고, 최선의 해법이었다. 그게 내 위로의 방식이니까 말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던 문장이 있다.
“나, 우울해서 빵을 샀어.”
처음 이 문장을 들었을 때 조금 의아했다. 아니 엄청 의아했다. 대체 ‘우울’과 ‘빵’의 연결고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찾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약간의 자책을 하기도 했었다. 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보면 이 사람이 T인가, F인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T이다.
우울한데 왜 빵을 사냐는 뉘앙스의 댓글이 꽤 달린 걸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히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 내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Thinking의 T.
Feeling, 즉 감정의 F가 아닌 T형 사람들은 ‘사고형’의 사람들이다. 어떤 일에 관한 판단을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실질적인 해결책을 주는 사람이 참으로 고맙다. 귀인이다.
T 말고도 나는 J이다. Judging, 즉 ‘판단형’이라는 뜻이다. 계획하려는 의지(J)와 분석하려는 이성(T)이 만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아주 정확한 이성적 판단을 기준 삼아 저 미래까지 예측하고 계획을 세운다. 내 예측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아주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불안감을 느낀다.
가끔은 이런 내 성격이 참 별로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피곤한 인생을 사는 것 같으니. 하지만 중세 미술을 공부하면서 21세기 현대인인 나의 이런 성격이, 어쩌면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인간의 한 종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탄>이라는 주제라 불리는 그림이다. 성탄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크리스마스’ 날 이다. 예수의 생일이니 당연히 기쁜 날인데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슬프다.
사실 예수는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계획하에 태어난 인류의 구원자이다. 나처럼 단순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훗날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계획된 미래를 품은 채 태어난 존재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걸 알고 있기에, 즉 ‘예견된 슬픈 미래’를 알기에 마냥 기쁘지가 않다.
그림이 그려진 중세에는 사건을 단편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유형론(Typology)'이라는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을 예표(미리 드러낸다) 한다”라는 논리이다. 아기 예수를 보며 십자가를 그리는 건 그들에게는 '가장 완벽한 논리'였다.
TJ형 인간이 중세에도 존재했다!
나는 종종 나의 '미래 예측'이 현재의 기쁨을 방해하는 결함은 아닐지 의심하곤 했다. 목표를 세우는 순간부터 실패의 가능성과 그 이후의 수습 비용을 계산하는 머릿속은 늘 복잡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휘고 판 데르 후스’의 화병 앞에서 나는 뜻밖의 동지를 만났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발치에 기어이 수난의 상징인 아이리스와 매발톱꽃을 꽂아 두었다. 탄생의 기쁨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 삶이 가야 할 끝까지 한 화면에 담아내려 했던 15세기의 TJ!
그가 선택한 꽃들을 들여다보면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보랏빛 ‘아이리스’의 잎사귀는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는 훗날 자식의 죽음을 목도하며 성모 마리아의 심장을 꿰찌를 고통의 예표다.
그 옆에 놓인 ‘매발톱꽃’은 또 어떠한가. 꽃의 뒷모습이 매의 발톱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처럼, 찬란한 탄생의 순간 이면에 도사린 비극적 운명을 날카롭게 낚아채듯 보여준다.
겉보기엔 그저 우아한 화병일 뿐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미래의 리스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뮬레이션해 둔 전략가의 설계도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와 그 이후를 함께 바라보는 시선만이, 우리에게 닥쳐올 운명 앞에서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는 것을.
그러니 나의 예측은 기쁨을 깎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책임지려는 가장 고독한 성실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엄마가 던진 "너 단호박이야"라는 말에 이제는 기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단호함은 타인의 감정에 무디거나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가올 비극과 변수까지 미리 계산해 둔, 최선의 해법을 건네고 싶은 나만의 절박한 애정이라고 말이다.
탄생의 화병에 칼날 같은 꽃을 꽂아 두었던 15세기의 휘고 반 데 후르처럼, 나 역시 오늘을 살며 내일을 예비한다. 비록 지금 이 순간 빵을 왜 샀는지 공감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이 그 빵을 다 먹고 난 뒤 마주할 현실의 허기까지 걱정하며 나는 또다시 나만의 정교한 화병을 닦을 것이다.
탄생의 기쁨 속에서도 묵묵히 슬픔의 꽃들을 골라내어 운명을 대비했던 중세의 화가들처럼,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내 곁의 사람들과 나의 오늘을 지켜낼 준비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