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계속 글을 씁니다.
2023년도.
졸업논문은 써야 하는 데 번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지통에 들어간 초록은 셀 수 없었다.
만약에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살았더라면 산책 겸 동네 미술관에라도 들어가 아이디어라도 얻을 텐데, 애석하게도 여긴 한국이다. 더 이상 검색도, 텍스트도 지긋지긋하다. 눈이 빠질 것만 같았다.
아니 근데 웬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이 열린다네?
얼리버드 티켓을 예매하고 오픈하기만을 기다렸다. 오픈 당일은 번잡할 테니 이틀 정도 뒤에 박물관을 찾았다. 근래 들어 서양 명화 전시 가뭄기라 이 전시가 몹시도 기대됐다.
두근두근 전시 당일.
세상에나, 전시장 입구는 일명 도떼기시장이었다. 서양화 전시에 이렇게나 갈증 나는 사람들이 많았다니. 대기 줄이 매표소 앞에 똬리를 튼 뱀처럼 구불구불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 사전 예매를 왜 받은 거야?’
불만을 터트릴 새 없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군중 사이를 유영하듯 그렇게 전시장으로 강제 진입 당했다.
전시장에서 사진은 잘 찍지 않지만 그래도 관심 시대 작품은 웬만하면 한 장씩이라도 찍어오는데, 이날 찍은 사진이 딱 한 장밖에 없더라. 얼마나 정신없는 시장통이었는지 새삼 다시 떠오른다.
그래도 이날 수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논문 리스트에 후보 선수로 있던 그림을 실제로 내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었다. 소란한 전시장 안에 나와 그림, 딱 두 존재만 있는 것처럼 잠시 고요해졌다.
‘그래 바로 이거다.’
책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그림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그림과 나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가이드라인이 있었고, 덕분에 세세한 부분을 보기엔 더욱더 턱없이 작았다.
그림 액자 안에 또 다른 프레임이 있다. 견고한 석재 건물 같은데, 그 안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문인지, 창틀인지 알 수 없지만 계단 앞에 공작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있는 걸로 봐선, 반려조를 키우는 집인가 싶다. 물그릇이 있는 걸로 봐선 반려조가 확실해 보인다! 남자는 좋아 보이는 목재 무대 겸 책상에 앉아 우아하게 독서 중이다. 화분도 두고, 수건도 걸려있고, 숙식이 가능한 곳인가 보다. 고양이도 키우고, 심지어 사자도 키운다! 그냥 그림을 봤을 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다.
남자는 성 히에로니무스, 또는 예로니모라 불리는 성인이다. 4세기 경, 갈리아어나 그리스어 등 여러 말로 쓰인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인물이다.(갈리아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국어다!) 광야에서 가시 박힌 사자를 도와주었더니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 옛 그림 속 웬 남자가 사자랑 같이 있다 싶으면 성 히에로니무스 성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성인은 방대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마리아에 관한 이론을 가장 많이 저술한 학자이기도 하다. 책꽂이에 그런 직업을 암시하듯 많은 책이 같이 그려져 있다. 또한, 공간 속에 보이는 화분, 물병 등은 마리아를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성인의 초상화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초상화라기보다는 그의 영적인 부분까지도 그려진 고차원적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알폰소 5세라는 왕이다. 왕은 자신의 얼굴을 성인으로 위장한 채 그림을 그렸다. 마치 ‘나는 책을 사랑하고, 지적인 인간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듯 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알폰소 5세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완벽한 연출이 오히려 나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책에 고개를 묻고 있고, 몸은 어딘가 편해 보이지 않는다. 책상은 높고, 의자는 딱딱하며, 공간은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다. 이곳은 사색의 성소라기보다는 오래 앉아 있기 힘든 작업대에 가깝다. 이 서재는 향유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버티는 공간이다.
나는 히에로니무스처럼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지도, 지식이 방대하지도 않다. 광야에서 믿음을 찾기 위해 방황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본다. 계속해 본다.
번역은 창조가 아니라 반복이다. 이미 존재하는 문장을 다시 읽고, 옮기고, 고치고, 의심하는 일. 히에로니무스의 성스러움은 계시에서 오지 않는다.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결국 글을 계속 쓴다는 것은 성인처럼 고귀한 존재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책상 앞에 앉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완성된 문장보다 버려지고 지워지는 문장이 더 많은 날에도,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책상에 앉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확신이 없어도 다시 앉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글을 계속 쓴다는 것은 믿음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표시다.
2023년.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완벽한 논문도, 창조의 확신도 단번에 답을 얻진 못했다. 물론 졸업논문을 통과해서 추가 학기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을 얻긴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실한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그리고 내 재능에 의심이 들어도 언제나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무언가를 창작해 내는 기쁨을 맛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도 나는 완성된 문장을 약속하지 않은 채, 확신하지 않은 채 다시 책상에 앉는다.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내가 끝내 믿기로 한 것은 재능도, 영감도 아닌 ‘그럼에도 계속해 보는, 버텨보는 이 태도’다.
결국 성공하는 사람은, 하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나가는 사람이라는 말 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