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는데 얼마나 걸리나요.
미술 연구가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몇몇 미술관이 있다. 그중 하나가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일 테다. 나 역시도 그렇다.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어, 마침내 그곳에 발을 들일 기회가 왔다. 넉넉하지 않은 일정 속에서 눈에 담아야 할 작품은 어찌나 많던지, 머릿속에는 ‘꼭 봐야 할 작품 리스트’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발에 불이 난 듯 전시실을 헤매며 주요 관심사인 중세 회화를 향해 직진했다. 거대한 그리스 조각상들에는 곁눈길조차 주지 못한 채 아쉬움을 삼키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여길 또 와보려나.' 속절없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하얀 조각상들은 눈이 부시도록 예뻤다.
중세 작품에는 여러 종류의 주제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성모영보(Annunciation)’를 가장 좋아한다. 성모영보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말한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메시지다. 성경 속에서 마리아는 천사의 등장에 놀라지만,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라고 응답하며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자, 소위 말하는 T형 인간이다. ‘천사’라는 존재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의문이 먼저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회화로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다.
'과연 옛사람 중에는 정말 천사를 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래서 날개 달린 형상으로 남긴 걸까?'
그림도, 화가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가느다란 눈을 뜨고 혼자서 추측을 이어갈 뿐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성모영보 작품은 여럿 눈에 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탈리아에 있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차선의 작품이라도 마주하고자 Gallery 39번 방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책으로 처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화가의 집요함과 상상력에 경외심을 느꼈던 작품.
플랑드르, 지금의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성모영보〉다. 막상 눈앞에서 마주한 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직사각형 안에는 유화로 표현된 섬세한 묘사가 옹골차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 이 맛에 덕후가 되지.’
짧은 감탄과 함께 가이드라인에 바짝 붙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림의 배경은 중세 성당 내부다. 마리아는 테이블 위에 성경을 올려두고 독서하던 중인 듯하고, 그 순간 천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천사의 복식이 눈길을 끈다. 값비싸 보이는 목걸이와 화려한 왕관, 그리고 범상치 않은 날개. 이 천사가 대천사 가브리엘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使者)이기에, 인간도 신도 아닌 존재로서 날개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천사의 날개에는 무지갯빛과 공작무늬가 섞여 있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권위와 신적 현존을 상징하고, 중세 우화집에서 공작무늬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을 의미한다. 이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화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각적으로 쌓아 올렸다.
대천사 못지않게 성모 마리아의 옷 또한 화려하다. 당시 황금보다도 비쌌던 아프가니스탄산 청금석 안료로 염색된 푸른 원피스는 테이블을 덮고, 의자까지 감싸며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그 안쪽에는 담비 털로 만든 듯한 이너웨어까지 보인다. 소박한 소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미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위엄이 느껴진다.
인물들의 입술 앞에는 황금색 글씨가 떠 있다. 각자의 대사다.
“Ave gratia plena(은총이 가득한 이여, 안녕한가.)”,
그리고
“Ecce ancilla domini(보십시오, 주님의 종이옵니다.)”.
마리아의 말은 하느님을 향해야 하기에, 글자가 거꾸로 쓰여 있다는 점까지도 화가는 놓치지 않았다.
천사 위쪽 창문으로는 황금빛 광선이 일곱 가닥 내려온다. 이는 성령의 일곱 은사인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경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 빛을 타고 내려오는 하얀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천사는 하늘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하고(‘말씀이 저기에서 왔다’의 뜻), 마리아는 두 손을 들어 올린다. 놀람과 경배, 수용이 동시에 느껴지는 몸짓이다.
성모영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물, 하얀 백합도 함께 드러나 있다. 황금빛 수술과 이를 감싸는 새하얀 꽃잎. 중세에 백합은 곧 성모 마리아였고, 순결과 미덕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보다 보면 숨겨진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모든 사물을 확인한 뒤, 한 발짝 물러나 큰 숲을 보듯 그림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혼잣말이 시작된다.
‘저 공간은 추울까, 더울까?’
‘석재 건물이니까 천사가 말할 때 목소리가 울렸을까?’
‘나는 저 질문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까?’
벽에 걸린 나이 많은 그림은 대답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그림은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늘의 너는 어때?”라고 묻는 것처럼.
얀 반 에이크의 〈성모영보〉 역시 그렇다. 내가 전적으로 믿는 존재에게, 상식적으로는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청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데 몇 초가 필요할까.
선택한 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을까.
정답은 없다. 다만 이 그림 앞에서 나는, 잠깐의 고민이 영원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바꾼 결정은 오래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성모영보>는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든다. 단 몇 초의 망설임, 찰나의 침묵 속에서도 인간은 방향을 선택한다. 성모 마리아의 응답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영원의 시간이 되었다.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묻게 된다. 과연 중요한 것은 고민의 길이일까, 아니면 그 순간을 감당하려는 태도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