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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Nov 16. 2020

남프랑스 작은 마을이 지켜낸 축제

제40회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 월간객석 2020년 9월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아비뇽 연극제·칸 영화제·망통 음악 페스티벌 등 여름 시즌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페스티벌들이 연이어 취소된 가운데 엑상 프로방스 근처의 작은 마을 라 로크 당테롱에서 기적적으로 페스티벌이 열렸다.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은 매년 여름 플로랑 성 정원에 마련된 2,000석의 야외 콘서트홀과 교외 각지에서 펼쳐지는 피아노 축제다. 올해 페스티벌은 8월 1~21일 3주간 열렸다. 


바캉스 시즌을 맞아 인구가 몰린 남프랑스에 코로나19 적색경보가 울렸지만 페스티벌은 무사히 끝이 났다. 유력 일간지들이 앞다퉈 이 페스티벌의 ‘생존’을 보도했을 정도로 상징적인 일이다. ‘야외’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 뒤에는 음악을 나누는 ‘안전한’ 장을 만들고자 했던 페스티벌 측의 신념이 있었다. 예술감독 르네 마르탱(1950~)은 “이런 어려운 시기일수록 예술가의 위안이 필요하다” 며 “대중과 예술가 사이에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했다. 두 달 전까지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가운데 라 로크 당테롱은 취소 대신 축소를 택해 프로그램과 연주자를 교체하고, 새로운 야외 장소를 마련했다. 재정의 대부분이 티켓 구매로 마련됨에도 불구하고 좌석을 1/3 가량 줄였다. 



플로랑 성 정원의 메인 스테이지. © Christophe Grémiot


40주년 기념 기획 역시 무산됐지만, 일자에 따라 ‘베토벤의 날’ ‘리스트의 날’ ‘바흐의 날’ 등으로 레퍼토리를 다채롭게 재구성했다. 연주자는 스페인에 사는 아르카디 볼로도스(1972~), 제네바에 사는 넬슨 괴르너(1969~), 뮌헨에 사는 율리아나 아브데예바(1985~) 등 자동차로 이동이 가능한 유럽권 연주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초청했다. 


필자는 8월 5·6일 ‘리스트의 날’과 ‘베토벤의 날’ 현장을 다녀왔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까지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껴야 했고, 각 길목마다 손 소독을 권장했으며 검표는 QR코드 스캔으로 했다. 안내·검표 등 자원봉사는 지역 주민들이 했다. 온 마을이 페스티벌을 위해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덕분에 실제로 연주가 끝나고도 숙소·식당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과 그날의 연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5일 오후 가로수 아래 연주하는 윌랑쿠르 © Christophe Grémiot

수백 년 된 플라타너스 아래서 

‘리스트의 날’인 5일 오후 연주 장소는 플로랑 성의 ‘산책로’였다. 성을 빙 둘러 연주 장소에 도착하니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플라타너스 열 속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오후 5시 해가 비쳐 드는 길, 푸른 나무 그림자와 자연의 소리가 자못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프랑스의 신예 피아니스트 탕기 드 윌랑쿠르(1990~)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 ‘제1년 스위스’와 프랑크의 ‘프렐류드, 코랄과 푸가’를 연주했다. 온전히 자연 속에서 잔향 없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음이 생경했다. 대신 새소리와 나뭇잎 소리가 여백을 채웠다. 윌랑쿠르 역시 ‘순례의 해’를 연주하는 동안 음색을 잡지 못하고 어려운 숙제를 해내는 학생처럼 보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안정을 찾았다. ‘발렌슈타트 호수에서’ 물결을 형상화한 아르페지오가 일렁이자 화답하듯 숲속에서 바람이 불었다. 연주를 마친 뒤 윌랑쿠르와 “이 장소는 ‘순례의 해’를 연주하기에 탁월한 장소”였음을 서로 동의하며 이야기 나눴다. 


산책로로 가는 숲길에 마련된 사인 테이블. 연주자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 © Yoonhye Jeon

예술감독 르네 마르탱은 “근처 여러 마을에서 열리던 공연을 성 안으로 제한해야만 했다. 이 장소는 올해 처음 시도된 것”이라 전했다. 그러나 단연코 이 산책로를 발견한 것은 이번 페스티벌의 쾌거였다. 다만 격정적인 포르테 표현이 어려워 보였다. 윌랑쿠르는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어려웠다. 또 매미 소리에 피아노 소리가 덮이곤 했다”며 이내 “그것이 곧 새로운 경험”이라고 후기를 남겼다. 연주는 코로나로 인해 인터미션 없이 진행됐다. 덕분에 그가 염두에 두었던 “D장조로 끝난 순례의 해에서 d단조의 프렐류드로 넘어가는 화음적 자연스러움”을 잘 느낄 수 있었다. 



5일 밤, 볼로도스. © Christophe Grémiot

장자적 리스트 

5일 오후 9시 메인 공연장에서 열린 아르카디 볼로도스(1972~)의 리스트 콘서트는 모든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기대를 받았다. 


볼로도스는 고난도의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 편곡으로 잘 알려진 기교의 대가지만, 최근 들어 본질에 몰두해 현자의 길에 들어선 것 같다는 평을 들은 터라 개인적으로 궁금함이 컸다. 마을 사람들도 이날 밤을 ‘볼로도스 나이트’라 부르며 관객을 부러워했는데, 티켓이 금세 매진됐고, 볼로도스가 라디오 송출을 비롯한 기록용 공식 녹음마저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대에 오른 볼로도스는 관객의 박수가 그치자마자 비관적인 왼손 반음 스케일을 몰아쳤다. 파도처럼 밀어치는 테크닉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번갈아 나오는 리스트 발라드 2번이지만, 그는 극명한 대비를 강조하기보다 물 흐르듯 평온하게 곡을 이었다. 또한 페달을 길게 썼는데, B조성 아래 단조와 장조가 뒤바뀌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어 리스트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는 ‘순례의 해’만큼이나 야외 연주에 걸맞은 선곡이었다. 끊임없는 트릴로 재잘대는 새소리는 적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연신 몸을 웅크리고 미동 없이 옥타브 연타와 연속 화음들을 덤덤하게 쳤다. 두 곡 모두 특히 박자에 연연 않고 여유를 두었다. 매끈하게 끝내는 교과서적 연주보다 즉흥연주처럼, 청중도 기교를 따지기보다 떠다니는 음과 여름밤의 무드 속에서 저절로 하나가 된 듯했다. 


슈만의 ‘유모레스크’는 잦은 템포와 분위기 변화에 기쁨과 슬픔, 재치가 한데 뒤엉킨 곡이지만 그는 완벽한 다이내믹 조절로 조각조각을 이어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청중의 강력한 요청으로 4번의 앙코르를 끝낸 그는 몸포우(1893~1987)의 ‘전원’ 중 2악장 ‘호수’로 끝맺었다. 종결구의 느릿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을 무렵 새 한 마리가 연주장에 날아들었다. 



6일 오전, 베토벤의 즉흥연주 대결을 20세기 스타일로 재현. © Christophe Grémiot

프랑스적 기질의 베토벤 탐구 

6일 오전의 ‘베토벤의 날’ 프로그램은 1800년 빈에서 있었던 베토벤(1770~ 1827)과 슈타이벨트(1765~1823)의 즉흥 연주 대결을 20세기 스타일로 재현한 것이었다. 


베토벤 역의 파스칼 아모아옐(1971~)과 슈타이벨트 역의 드미트리 사로글루 (1959~)가 청중에게 추천받은 교향곡 6번 ‘전원’ ‘엘리제를 위하여’ 등의 주제 선율을 가지고 즉흥 연주를 펼친 뒤, 교향곡 5번 ‘운명’ 전 악장의 중심 모티브로 짧은 즉흥 대결을 이어나갔다. 대결은 베토벤의 모티브를 단순 변주해 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후세대 작곡가들의 스 타일을 하나씩 가미해 발전시켜 나갔다. 마치 하나의 짧은 20세기 음악사 극을 보는 것처럼, 베토벤이 닦은 화성적 기반에 후대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간명하게 보여준 무대였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은 지금, 그의 곡으로부터 받은 영감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여러 방식으로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페스티벌은 일 년에 단 한 차례를 위해 준비하는 사업이다. 티켓 수익으로 한 해의 운영이 좌우되는 작은 마을 페스티벌이 규모를 줄여가면서 개최를 끝까지 지켜 낸 것은, 덕분에 새로운 장소를 발견한 것은, 실로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감독 르네 마르탱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몇 차례 “자연과 음악이 주는 치유의 힘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양일 마을과 숲과 성을 오가며, 음악과 자연이 가진 거대한 힘, 거대한 것에게 위로받는 형언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것이 이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꼭 필요한 것임을. 페스티벌이 지켜낸 신념은 온당한 것이었음을. 


글 전윤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월간객석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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