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쓰지만

나를 쓰게 하는 것

by 전윤혜


정말이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출근길 안국역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분명히 그 길에서 멋진 생각을 했는데, 퇴근하는 길에 떠올리려 보니 그때 무얼 생각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 바보 같은 건, 안국역 계단에서 나는 이미 이 멋진 생각도 하늘을 떠돌다 금방 사라지겠지, 하고 내가 잊을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글을 쓰지만 정작 내 글은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안국역에서처럼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 기분이 강렬할 때는 휴대폰에 짧은 노트라도 남기지만 그러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곧 나비처럼 날아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간다. 이전의 생각들은 금세 사라진다. 그러니 몇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히는 건 당연하다.


처음에는 내가 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다음 생각이 나를 압도하니까 또 그 생각을 하느라 ‘잊는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이다. 그렇게 삶이 뒤안으로 잊히는 것도 모른 채,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있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되새길 수 있다고 자부한 일들도 한참 뒤에 쓰고 보니 볼품없었다. 순간의 기분과, 그때 떠오르던 단어와, 생생한 생기가 없으니까.


단어를 남기기 시작했다. 나는 글재주를 타고나지 않아서 멋진 영감을 받는다고 곧바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없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 생각을 문장으로 꺼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하늘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무얼 쓰고 싶은지도 모른 채 아름다워서 남기고픈 장면들 사이에서 방황했고 메모엔 단어들만 남았다. 문장 역시 대개 명사형으로 끝이 났다.


남산터널을 지날 때 얼룩얼룩 쏘이는 주홍빛, 마감하는 새벽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선율, 손바닥에 잔꽃처럼 묻은 빨간 플러스펜, 남쪽 나라에서 맞는 따뜻한 비-


단어는 잡아끌어 문장으로 꿰지 않으면 그대로 날아갔다. 단어의 모양새는 당시를 상상하게 만들어 줄지언정 내가 그때 그곳에서 뭘 느꼈고 어떤 생각을 왜 했던 것인지까지는 알려주진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휘발되어 버리는 순간들이 아까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왜 나는 자꾸만 잊을까. 아름다운 것에 대해 쓰고 싶은데 나는 그걸 담아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건 찰나였고 그 모습은 항상 조각나 있었다.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먼 순간 놓치고 싶지 않아 끄적였던 파편들에, 잊고 싶지 않아 조사를 붙였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쓰지만 나를 쓰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을 잃어 버릴 거란 강박, 또다시 머릿속에서 사라질 거라는 그런 자조였다.


결국 나를 쓰게 하는 건 이 빌어먹을 기억력이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글을 쓴다니. 그 이유가 참 초라하다. 여전히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잊지 않기 위해서 남기기 시작한 게 글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생과 나라의 역사가 쓰여 왔다. 로마 제국의 거대한 이야기와 모네의 삶이, 안네의 일기가 같은 이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