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 11일째 아침 풍경
책을 읽다가 여자 래퍼의 찐득한 랩이 나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책을 덮었다. 쨍 해가 떠오른 지중해 칸.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맞으며 오늘은 뭘 할까, 프랑스에 온 후로 책 한 권 끝내지 못한 게으른 나를 자책하며 집어 든 책인데. 이따금 햇볕이 반사되는 말간 베이지 빛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차였는데.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무렵 친구가 된 프랑스 좌파 사진작가 폴과 우파 정신분석가 보두앵라르티크가 이해가 안 되는 서로를 막 이해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린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라. 같은 침대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갈 하고 있지만, 나는 쓰고 그는 블리자드에서 나왔다는 카드 게임을 한다. 카드라 해도 종류가 너무 다양하고 일일이 외우는 게 힘들어 능력치를 파악하는 데 공을 들이는 모습이, 뭐랄까 내 동생이 이렇게 온종일 누워 게임이나 했으면 답답해서 머리라도 한 대 꽁 쥐어박았을 텐데, 왜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릴 때는 이런 내 감정을 시시콜콜 공유할 수 있는 남자, 재즈와 클래식을 좋아하고 같이 그림을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남자, 나와 같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여전히 그런 남자가 멋있긴 한데 나는 블리자드 카드 게임을 하는 남자를 더 사랑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그의 취향이 아닌 취향 하는 ‘방식’을 존중하는 것 같다. 어제 그는 블리자드가 게임을 업데이트하며 능력치 높은 카드를 명예의 전당에 올리는 바람에 이제 사용하지 못한다는 비보(나에겐 낭보)를 전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나를 피식,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러한 억지 업데이트에 짜증 내는 게 아니라 그 카드 없이 다른 카드로 더 좋은 공격력을 조합하고 발견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더 신난다는 그의 모습이.
그럼에도 우린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무 달라서 웃음만 나온다. 어제도 나는 글을 쓰다 멈추었는데, 그건 내가 튼 유자 왕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콘체르토가 너무 감동적이어서였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데뷔에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핏줄이 드러나도록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섹시하고 감동적이어서. 물론 연주도 말할 것 없이 좋았지만 말이다. 내가 브람스를 들을 때 그는 비행기 소음까지 차단한다는 보스 헤드폰을 끼고 열심히 총격전을 벌였다. 전염병이 덮친 뉴욕에서 살아남는 이 게임(Tom Clancy's The Division 2)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자가 격리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시뮬레이션이라며. 잠시 헤드폰을 벗은 사이 브람스 심포니 3번 3악장을 잠시 들은 그는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악인데.” 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에서 이브 몽땅과 제인 버킨이 이 멜로디로 노래를 불러 유명했었네.
진짜 다른 세상. 내가 프로코피예프와 브람스를 듣는다면 그는 프렌치 래퍼인 담소나 미국의 어린 래퍼 익스익스익스텐타시온의 음악을 듣는다. 자가 격리 때문에 집에만 있으니 나는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그간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는데 그는 그랑 투리스모를 켜서 차를 몰고, 새 업데이트에서 추가된 폭스바겐의 1980년대 최초의 경주용 차 중 하나였던 골프 GTi, 2017년 출시한 포드의 전설적인 GT를 구경한다. 내게 재규어의 역사를 가르쳐주더니 오래된 차를 꺼내 새로 도색하고 교토의 서킷에서 레이싱을 한다. 모터바이크를 타고 싶을 때면 라이드를 켜서 가와사키의 괴물 모터바이크 닌자 1000cc를 몬다. 이쯤 되니 그에게 자가격리란 천국인가 싶다.
매일 같이 코로나바이러스 뉴스를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는 이미 다 겪은 일이야, 달관했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안일함을 비판하지만, 그는 클로로퀸과 말라리아 예방약과 코로나바이러스 치료의 상관관계의 논문을 찾아서 읽고 있다. (물론 너무 어려워서 중도 포기.)
취향이 다른 이유는 관심 있는 분야가 달라서인데 그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는 평범한 남자의 취향을 가졌지만 스스로 깨닫는 것이 많다. 나는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 좋기 때문에 취향이 달라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서로 배운다. 브람스 3번 3악장의 멜로디를 샹송 가수들이 불렀다는 것, 재규어가 1900년대 초 사이드카를 만들던 작은 공업소에서 시작한 브랜드란 것, 클로로퀸이 왜 코로나바이러스를 약화시킬 수 있는지도 알게 됐다. 나의 책을 덮게 만든 노래는 Megan Thee Stallion의 것으로 내 플레이리스트에도 들어갔다. 에릭 사티와 슈만 사이에 몸 더듬는 섹시 스타가 있으니 참으로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