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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Aug 29. 2021

베르디가 상상하던 밤

2021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中 팔스타프



시청 광장을 지나 아르슈베셰 극장으로 올라가는 길. ⓒYoonhye Jeon


13, 14일 엑상프로방스 구시가 꼭대기의 야외 극장인 아르슈베셰(Théâtre de l'Archevêché)에 베르디의 ‘팔스타프’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올랐다. 두 작품은 나이 든 귀족 남성이 여성을 탐하다 결국 모두에게 놀림을 당하고, 용서를 받는다는 비슷한 줄거리의 작품이다. 이 늙고 탐욕스런 남성들을 연출가 배리 코스키와 로테 드 비어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늙은 귀족이 외로운 옆집 아저씨로


코스키는 팔스타프를 어딘가 외로운 옆집 아저씨처럼 만들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좋아하며,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불쌍한 아저씨. ‘호주 출신 유대인 게이 연출가’라는 배리어를 뚫고, 베를린 코미셰 오퍼에서 10년을 감독으로 숱하게 희극을 연출해온 베테랑답게 그는 극과 현실의 경계 허물기에 있어 늘 강력한 한방보다는 잔잔한 웃음을 찾는다. 그의 희극 연출법이 언제나 새롭지는 않음에도 언제나 환영받는 이유다. 웃음을 좇다 보면 ‘웃긴 이야기’는 역시 시대를 막론한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팔스타프는 평생을 비극 오페라를 작곡해온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유일한 희극 오페라라, 베르디의 인생철학이 녹아 있다는 거창한 수식이 붙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굉장히 이해하기 쉽다. 마지막 작품이 쉽다는 것 자체가 ‘철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팔스타프에 담긴 주제를 요약하자면, "인생사 복잡할 것 없이 한바탕 웃고 용서하고 떠나자!"


오페라가 쉽다는 말은 한편으론 클리셰가 다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늙고 뚱뚱한 귀족 남성. 호색한. 색욕을 순수한 사랑으로 믿는 사람. 여인들의 속임수에 의심 없이 당하는 바보 같은 행태. 극명한 권선징악으로 골탕 먹이고 용서하자는 줄거리. 음악 또한 모차르트 스타일의 가볍고 형식적인 진행이다.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없다면 그저 누군가의 진부한 희극 오페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는 큰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이지 이 작품은, 시대상을 고증하는 형식의 연출을 한다면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코스키는 이러한 점을 지금의 현실로 들이기 위해 팔스타프라는 인물의 환경과 성격을 세밀하게 세팅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와인, 여자를 즐기며 탕진하다 결국 결혼도 못하고 돈도 떨어져 허름한 여관에 신세를 지는 몰락한 귀족. 쉽게 말해 돈은 많지만 예의는 모르던 졸부였다가 개털이 된 늙은 아저씨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음식과 성욕이라는 인간의 근본이면서도 말초적인 감각을 사랑한다. 뒤로 음흉해서 찝찝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앞으로 다 드러내는 타입. 덕분에 귀족 부인들에게도 손쉽게 놀림당한다. 그 우스운 복수극을 보고 있자면 팔스타프가 어쩔 땐 불쌍하기도 하고 때론 귀엽게 느껴지기까지도 한다. 팔스타프에게 연민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코스키의 의도다.


©Monika Rittershaus



가장 무해한 디오니소스


팔스타프에선 ‘음식’을 끊임없이 등장시킨다. 현재의 쾌락에 충실한 팔스타프를 자연스레 '미식' 행위에 투영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먹방(혹은 쿡방) 유튜브 같았다. 팔스타프는 실제로 무대에서 직접 요리를 하며, 장이 바뀔 때마다 내레이터들이 그의 레시피를 읊는다. 또 배우들은 빵, 케이크 등 음식을 무대 위에서 실제로 먹고, 2막 여관 식당에서는 갑작스레 토스터기에서 식빵이 노릇하게 구워져 나온다거나, 3막 동물 분장을 하고 숲에서 몰래 만나자는 백작 부인의 꾐에 속은 그는 바게트로 만든 사슴뿔 달고 나온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먹는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먹고 마시는 식탐은 그의 끊임없는 색탐과도 연결된다.


©Monika Rittershaus


배리 코스키는 “팔스타프는 디오니소스의 가장 무해한 버전이며, 모든 나라마다 이러한 전형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원 없이 먹고 마시는 귀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성을 희롱하고자 하는 사람. 식욕과 색욕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 쾌락으로 대변되는 디오니소스적 기질. 결국 본질만 보면 팔스타프는 모든 인류에게 나타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며, 그것은 역시 우리 역사에서도 있어왔다. '춘향가'의 변사또나 지역 탈춤에 언제나 등장하는 음흉한 땡중, 또 양반 아저씨들처럼 말이다. 때문에 영민하게 문화, 역사적 선입견을 걷은 채, 본질만 들여다본다면 팔스타프는 구대륙의 탐욕스러운 귀족이라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와 문화의 배리어를 깨는 캐릭터 연구는 우리에게 팔스타프라는 인간성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어떤 방향으로든 보는 이에 따라 공감을 일으킨다. 우리 시대에선 불편할 수도 있는 낡은 소재로 어떻게 공감을 일으켰을까. 코스키는 팔스타프를 그의 말마따나 '무해하게' - 그의 권위적인 느낌을 덜고 좀 더 순수하고 직선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조금 더 사람 냄새가 풍기게 만들었다.


©Monika Rittershaus



간명한 무대 위 빛나는 주역


무대와 의상은 60년대 미국식 복고 스타일로, 아주 밝은 LED 등에 반사된 당시의 컬러들은 더욱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작고 오래된 야외극장이라 세트를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배리 코스키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무대를 바꾸는 대신 컬러로 승부를 본 것이다. 무대엔 라임에 가까운 연둣빛 벽지만 둘러져 있고 벽지는 바닥까지 이어져 공간이 더 넓어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실제로 막이 오르며 쨍한 라임색 공간이 드러나자 관객석에선 작은 탄성이 나왔다. 빨강, 청록, 꽃분홍 옷을 입고 나타는 귀족 부인들이 등장했을 때, 그 패턴과 같은 수트를 입고 한껏 멋을 낸 팔스타프가 등장했을 때, 관객은 웃었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놀람도 섞여 있었다. 아름다운 컬러 조합만으로도 존재감이 이미 빛나던 등장인물들은 큰 무대 장치가 없기에 더욱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고, 관객은 그들의 과장되고 자유로운 몸짓 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팔스타프 역 크리스토퍼 퍼브스(Christopher Purves)는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언과 같은 연기로 시종 웃음을 자아냈다. 락밴드 출신의 싱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기도 한 퍼브스는 과장된 표정과 행동을 굉장히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가수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캐리커처처럼 느껴지게 하는 어떠한 타고난 광대스러운 기질이 있다. 그의 진가는 2015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오른 헨델의 오페라 ‘사울’에서 환각에 시달리는 미친 왕 사울을 연기하며 이미 입증됐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재공연된 ‘사울’ 프로덕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리지널 주역이기도 하다.


'사울' 속 크리스토퍼 퍼브스.


'팔스타프'의 퍼브스. ©Monika Rittershaus

배리 코스키는 모노드라마나 다름없는 팔스타프의 주역을 이번에도 퍼브스에게 맡겼다. 그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코스키가 곳곳에 숨겨놓은 원초적인 장치(예를 들어 앞치마만 걸친 팔스타프가 뒤로 돌았을 때의 예상치 못한 끔찍한 뒤태, 여러 가발을 자유자재로 벗었다 쓰는 모습 등)를 훌륭히 소화했다. 가벼운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코스키가 마이크로 디렉팅한 장치들과 이를 제대로 흡수한 퍼브스의 연기는 유쾌하고 뒤끝 없는 웃음을 유발했다.


아르슈베셰 극장의 의자들이 삐걱이고 여름 바람 미스트랄에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마침 관객석엔 사이먼 래틀도 오늘자 공연을 보러 와 있었고, 마에스트로의 곱슬거리는 백발도 다른 관객들처럼 함께 휘날렸다. 마에스트로든 거금을 후원한 그랑 메세나(큰 메세나)든, 애호가든, 학생이든, 동양에서 온 나 같은 기자든 우리는 여름밤 작은 옛 나무 극장에 앉아 함께 웃었다. 백 년 전 '팔스타프'가 공연되던 밤도 이랬을까? 어쩌면 베르디가 ‘팔스타프’를 쓰며 상상하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여름밤의 아르슈베셰. ⓒYoonhye Jeon



* 함께 관람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노센스'는 앞글에, 로테 드 비어의 '피가로의 결혼' 리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월간객석 8월호에 실린 기사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 화제에 화제를 거듭한 여름밤>의 원문입니다. 축약된 버전은 월간객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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