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에 커피 물을 올리고 손빨래를 한다
알프스에 산다. 사람들에게 말할 때면 와, 너무 좋겠다, 경치 어때요, 부러운 소리를 듣는다. 거창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그냥 작은 산골 마을이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거나 스키 타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동네. 물론 경치는 아주 좋다. 통나무집들 사이로 구름이 낮게 지나고, 해가 질 땐 능선을 따라 뾰죽뾰죽한 소나무 그림자가 흰 산에 드리운다. 점점이 흩어진 별장들. 밤이 되면 그곳에 노란 불이 켜지고 산 위로 별이 뜬다.
영화 <덤 앤 더머>에서 덤 앤 더머가 찾아간 메리 스완슨의 집을 기억하는지. 덤(짐 캐리)이 메리와 결혼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거란 꿈을 꿀 때의 그 집. 다들 스웨터를 입고 선물꾸러미를 펼쳐볼 법한 그런 느낌. 그런 멋진 곳이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사이에 낀 보급형 통나무집이랄까, 의 작은 스튜디오(원룸)에 머무르고 있다. 어쩌다 삶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주로 글을 쓰고, 날이 좋으면 산책을 나가고, 잠을 충분히 잔다.
두어달 전 간단한 옷가지와 랩탑만 챙겨 이곳으로 왔다. 커피 머신이 있길래 커피와 커피 필터를 샀다. 조금 낡아 보였지만 씻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찌든 때는 쉬이 지지 않았고 커피 머신 하나 사느니 냄비로 끓여 먹지 뭐, 하던 게 지금껏 이어진다.
머신에 커피를 부으면 자동으로 커피가 내려지는 그 편리함 대신 냄비에 물을 올린다. 물이 끓을 동안 집 찬장에서 발견한 작은 거름망에 필터를 올리고 커피를 붓는다. 물이 끓기 직전 몽글몽글 움직이는 아지랑이들과 그 잠시가 지나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을 구경한다. 넙적한 냄비 주둥이로 조심스레 쪼로록 물을 따르면 김이 오르고, 금세 커피 향이 퍼진다. 거름망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맑은 소리. 커피를 마시며 가끔은 오래된 피아니스트들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음반을 듣는다. 유성기 녹음에 잡음 섞인 아주 오래된 음반들.
이 동네 집들은 이상하게도 식기 세척기는 있지만 세탁기는 없다. 주로 연말이나 스키 시즌에 찾아오는 가족들에게 단기 렌트를 놓아서다. 마을 입구 빨래방은 10유로가 넘으니 별수없이 손빨래를 한다.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만. 아침 세수할 적 물에 담가놓은 빨랫감들은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적당히 불어 있다. 세제를 풀어 조물조물, 허리를 곧게 펴고 팔힘으로만 주무르려 노력한다. 물에 두어 번 헹구고 나서 너무 꼭 짜지 않은 채로 라디에이터에 걸친다. 라디에이터의 뜨거운 열이 빨래의 물기를 앗아간다. 한겨울 입김처럼, 끓는 주전자처럼.
다림질을 해야 하는 날엔 침대의 시트를 빼 발코니에 털고, 테이블에 깔아 다림판을 만든다. 간이 정수기로 물을 깨끗하게 내린다. 석회암이 녹아든 이곳의 물을 뿌리면 옷에 하얀 얼룩이 남기 때문에. 물을 뿌리고 주름을 편다. 방이 작아 금세 다림질 냄새가 가득해진다. 소매 솔기부터 앞판, 뒤판을 연이어 다린다. 좋지 않은 성능의 철다리미로 주름을 펴기 위해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간다. 쳇 베이커나 사라 보건, 니나 시몬, 콜 포터. 오래된 재즈를 튼다.
청소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 역시 봄이 되면 떠날 몸, 대신 조그마한 파란 빗자루를 하나 산다. 창문을 열고 리클라이너 베드를 접어 소파를 만든다. 차가운 바깥공기 속에서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천천히 바닥을 쓸어 나간다. 눈이 오는 날엔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구경한다. 교회 종소리라도 울리는 날엔 귀를 기울이고 이곳의 소리를 듣는다. 12시 정각의 오래도록 치는 종이 좋다.
작아 보이는 일들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반복한다. 오래도록 손을 움직이는 그 느낌은 자못 신성하다. 내 집이라 부를 곳만이 감당할 수 있는 큰 기계들이 대신 해오던 일을, 그 기계들이 등장하기 전의 엄마를, 엄마의 엄마를 생각한다. 청소기 없이 방을 쓸고, 작은 황동 철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도란스transformer로 전압을 바꿔야 하는 일제식 철다리미를 쓰던 그런 사소한 일들.
알프스에 살 뿐 남들처럼 똑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내리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경치 좋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경치보다 이제껏 몰랐던 즐거움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어 좋아요, 하고 대답한다. 과거로 돌아간 불편함보다 과거로 돌아와 얻은 낭만을 생각한다. 조용하고 느리게 오래도록 반복되는 것들의 즐거움을, 그 신성한 기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