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주지 않아도 돼

거창하지 않은 우리의 발리, 누사 두아

by 전윤혜


깜깜한 바다 위 고속도로를 탄다. 바다 위로 붕 떠 가는 느낌이 마치 어릴 적 교과서에 보던 자기부상열차를 타면 이럴까, 싶다. 택시 기사 말로는 이 도로Bali Mandara Toll Road를 타면 돈을 더 내는 대신 공항 근처의 끔찍한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단다.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쐰다.


우리는 누사 두아Nusa Dua로 가는 중이다. 발리는 북쪽의 납작하고 둥그런 덩어리와 남쪽의 작은 덩어리를 좁고 긴 꾸따Kuta 지역이 잇는 형태다. 대략 오카리나처럼 생겼다 치자. 누사 두아는 오카리나 손잡이 아래 오른편에 있다. (두Dua 섬Nusa이란 뜻으로, 해변가에 모랫길로 연결된 작은 두 섬을 두고 이름이 붙었다.) 파도가 모래둑을 쌓고, 그 모래가 잔잔한 바다를 만들고, 잔잔한 바다가 수상 스포츠를 즐기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이를 놓칠세라 하얏트, 웨스틴, 소피텔 등 대형 호텔 체인들이 앞다투어 리조트를 만든 곳이다. 니콜라스는 가격 대비 훌륭한 퀄리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숙소를 잡느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예약부터 했단다. 우리 숙소는 좋은 리조트 사이에 깨끗하게 단장한 공략형 호텔 같다. 가격은 호주 달러로 33불 줬으니, 27,000원 정도. 필리핀에서 고생한 기념으로 호사를 부린다. 얼마 만에 만나는 넓은 침대냐! 샤워를 하고 쓰러진다.


Palm Bamboo Hotel. © Yoonhye Jeon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빨랫감들을 분류한다. 땀에 절은 재킷이나 운동화 등 까다로운 것들은 숙소에, 막 입는 옷들은 시장에 맡기기로 한다. 태양이 따뜻하고 바람은 뽀송뽀송한 날. 방앞마다 가꿔진 정원이 싱그럽다. 기분 좋게 조식을 먹고 후식으론 수박 주스를 마신다. 발리의 위도는 -8.5도.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대부분 적도 위에 있어 여름이 우기인데 반해 남반구인 발리는 여름이 건기다. 빨래하기 딱 좋은 날씨. 수영하기도 딱 좋은 날씨다.


“우리 오늘은 다른 것 하지 말고 수영만 하자.”


아침부터 수영장에 뛰어들어 맘껏 해를 만끽한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실컷 쉬고 싶은 맘도 컸지만, 사실 수중에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없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니콜라스는 여행 떠나기 전에 출금 환전 수수료 없는 여행용 카드를 신청했는데, 호주에서 받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 이 호텔로 보내 놓았다. (그렇다. 만약 니콜라스가 여권 때문에 출국을 못한다면, 나 혼자 여기 와서 받고 다시 마닐라로 돌아가기로 한 그 우편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보다 우편이 먼저 도착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니 굳이 먼저 출금할 필요도 없었다. 공항에서는 유심을 받은 뒤 바로 고젝(Gojek, 애플리케이션)으로 택시를 불러 카드 자동결제를 한 뒤 여기로 왔다. 여행하기 정말 좋은 세상이면서도 결국 수중에 현금이 없다. 현금이 없으면 스쿠터도 못 빌리고 로컬 식당도 못 가고 맥주도 못 마신다. 그러나 오늘만은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무사히 발리에 도착한 게 어디야.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 종일 여기 있자.



아이들처럼 신나게 장난을 친다. 한쪽 거북이 분수의 입을 막으니 다른 거북이 분수의 물길이 거세진다. 수영장 안에서도 수압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물이 나오는 부분이 있구나. 몇 개의 구멍에서 물이 나올까, 두 개, 세 개, 차례차례 막다 보니 결국 거북이가 수영장 끝까지 물을 내뿜는다. 니콜라스는 물속에서 혼자 앞돌기 뒷돌기를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난리다. 한참을 놀고 있는데 직원이 우릴 부른다. 집배원이 와 있으니 사인을 해 달라고. 와, 기가 막힌 타이밍!


멋진 날씨, 새까만 우리. ⓒ Nicolas Riou, Yoonhye Jeon


기쁨의 댄스를 추고선 다시 물로 뛰어든다. 매번 거창히 수영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수영을 잘 못한다. 몇 년 전 3개월 배운 자유형과 배영을 더듬어 열심히는 해 보지만 폼이 영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배울 땐 엄마가 조오련 같다고 했는데. 수영 배우는 건 평영에서 멈추었다. 자꾸만 한쪽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흥미를 잃었다. 균형 감각이 약한 건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스케이트를 타러 가면 몇 발짝 가다가 물집이 잡혀 그냥 벤치에서 쉬었다. 롤러스케이트, 인라인 스케이트 말할 것도 없다. 무서워서 사달라고 조르지조차 않았다. 웃기지만 두 발 자전거도 잘 못 탄다. 안장이 조금 높은 자전거를 타거나 핸들을 틀어야 할 때는 굉장히 바보 같다. 평영에서 막혔을 때도 그러려니 하고 포기했다.


니콜라스는 움직이는 활동들을 모두 좋아한다. 14살(우리 나이 16살)부턴 스쿠터를 몰았고, 군인 출신인 탓에 ‘생존’하려 수영했으니, 뭐 다른 말이 필요 없다. 한 마디로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랄까. 호주에서 니콜라스와 해변에 갈 때마다 그에게 물에 오래 뜨는 법, 긴장을 푸는 법, 균형 잡는 법, 물속에서 회전하는 법을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다에선 노력해도 물을 먹기 일쑤였다. 발이 닿지 않는 두려움, 열려 있다는 두려움, 파도를 못 헤쳐 나오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 모두 나의 자신감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잘 못해.’ ‘난 파도를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주로 얕은 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파도를 탔다. 수영장에서는 좀 낫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여기가 우리의 첫 수영장이다.


윤혜, 깊은 곳에 내려가서 숨을 참아 보자. 코로 흥 바람을 짧게 내쉬어야 코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아.”


“이번엔 바닥까지 내려가서 땅을 짚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거야. 잘 봐. 깊은 물에서 움직이는 거야.”


차례로 도전해 본다. 손으로 몇 발짝 짚지 않았는데도 숨이 가빠 올라오고 만다. 니콜라스는 숨을 참을 때 억지로 다 들이마시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한다. 숨이 모자랄까 후웁- 모든 숨을 들이마시는 자체가 이미 두렵다는 증거고, 이런 과한 몸짓이 몸을 경직되게 만든다. 내가 물에 뜨지 못하는 이유는 빠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다.



ⓒ Yoonhye Jeon


밖에 나가 빨래를 맡기고, 로컬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시 들어와 수영을 한다. 저녁이 되니 또 배가 고프다. 심플하고 멋진 삶이다. 이번엔 리조트 쪽으로 걸어본다. 버거 하나에 20달러씩 하는 레스토랑들은 갈 수 없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뒷골목으로 들어선다. 다 낡은 현수막을 씌운 허름한 노점에 묻는다. 현지인들을 상대하는 듯한 가게. “지금 밥 먹을 수 있어요?” 주인아주머니는 전혀 영어를 못하고 아들이 나오더니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준다. 이런 열정이라면 무언들 못 먹을까. 소토 아얌Soto Ayam이라는 인도네시아식 닭국과 두부 부침을 시킨다. 국물 요리, 특히나 향신료가 강한 국물이 익숙지 않은 니콜라스는 먹어 본 데 의의를 둔다. 한참을 걷고 뜨끈한 국물까지 먹으니 덥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가루 주스 어떻냐고, 줄줄이 매달린 가루들을 꺼내 보여주며 신나서 권하는 아들이 꽤 귀엽다. 엄마를 도와주는 마음도 너무 예쁘고. 그래, 한 잔 마시고 길을 나선다. 테이블에 더 많은 돈을 놓고서.



바람 불던 밤. © Yoonhye Jeon


바다를 따라 산책하고 싶은데 리조트들이 바다를 막고 있어 가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할까? 아마 답은 '골목'에 있을 거다. 큰 건물에는 현지인이나 직원들을 위한 길이 있게 마련이니까.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 한 골목에서 몇 남직원들이 간이 수돗가에서 손발을 씻는다. 조금 더 가 보니 길 끝에 호젓하고 낭만적인 백사장이 나타난다. 리조트를 밝히는 노란 불빛이 바다를 비추는 아름다운 풍경. 모래사장까지 뻗은 수영장에도 노란 불이 일렁인다. 야외 테이블은 커튼을 가지런히 묶고 신혼부부들을 기다린다. 바람이 조금은 거세서, 예쁘게 장식해 놓은 장미 꽃잎들을 휘날린다. 우리 둘도 사이좋게 걷고 있으니 누가 봐도 허니문 온 커플이네.


한참을 걷다 나루 끝에 정자에 앉는다. 파도가 둑에 부딪쳐 찰싹찰싹 얕은 소리를 낸다. 둘이 가만히 기대앉아 밤하늘을 본다. 전갈자리가 떠 있다.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랗고 구부러진 모양. 지금 우리가 남반구에 있어서 전갈 머리가 왼쪽으로 가 있어, 우리가 살던 나라에서는 오른쪽이 머리야, 전갈자리 아래 빛나는 별은 목성이야, 목이 꺾어져라 별을 본다. 서울에선 별자리 보기가 참 힘들었다. 빌딩들이 높기도 하고, 미세먼지도 있고, 거리의 불들이 밝아서 별이 가려 있기도 하고. 호주 하늘에서 별자리를 본 뒤로는 왜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이 별자리를 만들었는지, 왜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이해하게 됐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가 여름이면 매일 밤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보곤 했다는 말도.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간다. 뒤에선 호텔이 조명을 쏘아 주고, 하늘에선 별빛을 내려준다.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어딜 가지 않아도, 힘을 주지 않아도 여행은 자연스레 흘러간다.


© Yoonhye Jeon


숙소로 돌아와 별이 그려진 맥주를 한 잔 마신다. 호화 리조트 1박을 걸고 카드게임을 한다. 푸켓에서 제대로 즐겨보자며. 아마 계속해서 숙박비를 부담하는 니콜라스가 내게 너도 좀 내라곤 말은 못 하고, 티 안 나게 한 턱 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권모 술수가 난무하는 작은 테이블. 5판 3선, 전윤혜 패.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슬금 비친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따라 웃는다. 그래. 한턱 시원하게 낼게. 우리가 여행하는 법. 웃으며 여행하는 법.


IMG_0305.JPG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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