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중요한 건 아닌데

혹시 모르는 게 여행이니까

by 전윤혜


마닐라 공항에서 7시간 환승을 하면서 유심 데이터가 2G나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어쩐지 휴대폰이 영 안 터지더라니. 니콜라스는 이를 놓칠 세라 넷플릭스 시리즈를 다운로드하는 건 어떠냐 물었다. 그럼 네트워크 없이도 볼 수 있다며.


“혹시 모르니까Just in Case!”


니콜라스는 시드니 시절 넷플릭스 중독에 가까웠다.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면 꼭 챙겨보고 내게도 소개해주고 싶어 했지만, 별 관심이 없는 난 항상 시큰둥히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그는 이번이 나를 넷플릭스 시리즈로 이끌 좋은 기회라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가 재미있게 봤다는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시즌 1을 다운로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발리 여행이 다사다난한 바람에 넷플릭스 따위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탈이 났다. 바투르 산에서 내려온 날 원기충전을 해야 한다며 뷔페식당에 가서 허겁지겁 먹고서, 숙소에 돌아와 빈땅을 한참 마시고 잠들었다가, 다음날 여전히 배가 부름에도 조식 값이 아까워 커피까지 탈탈 털어먹고, 단골 식당 안 가기가 서운해 두 번이나 들렀던 거다. 탈이 났지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먹은 바람에. 아니, 많이 먹은 게 탈이다.


멋진 풍경에 식욕이 동해서 그만. © Yoonhye Jeon, Nicolas Riou


화장실에 앉아 있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천장이라도 뚫려 있어 다행이다. 경치라도 구경할 수 있으니까. 화장실 문이 없는 탓에 내가 화장실 갈 때마다 애꿎은 니콜라스만 바깥으로 쫓겨난다. 화장실에 있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 있다. 몸이 괴롭지만 발리까지 와서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더 괴롭다. 누워서 뭘 할까. 문득 휴대폰에 다운로드한 ‘기묘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날도 좋겠다, 창문을 활짝 열어 자연광을 들인다. 침대에 엎드려 베개를 가슴팍에 받친 뒤 휴대폰을 침대 헤드에 기댄다. 좋아. 이제 플레이 버튼만 클릭하면 돼. 그런데 잠깐, 왜 우리 휴대폰으로 보는 거지? 숙소 와이파이 연결해서 랩탑으로 보면 되는데.


랩탑을 침대에 놓고 다시 엎드린다. 그러나 와이파이로는 넷플릭스 접속이 안 되는 것이다. 숙소에서 막아놓은 것 같다. 유튜브는 되는데 왜 넷플릭스만?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우리 숙소는 발리에 정착한 지 9년 된 미국인 아저씨가 지은 곳이다. 일대에 비해 저렴하고 조용해서인지 여행객이 아닌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장기 숙박객들이 제집 티비 틀 듯 와이파이로 넷플릭스를 틀고 하루 종일 보냈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괜찮아. 우리에겐 핫스팟이 있으니까. 호기롭게 핫스팟을 켜려는데 아이콘이 눌러지지 않는다. 알고 보니 클룩에서 산 유심이 핫스팟을 막아 놓은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 돼’ ‘포기해’가 되는 상황. 그렇다고 단번에 그만두는 건 우리 성격이 아니지. 혹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 Yoonhye Jeon

휴대폰 화면을 랩탑 화면으로 옮겨 보여주는 미러링을 시도해 본다. 케이블이 필요하단다. 휴대폰 충전기 케이블은 usb 포트고, 랩탑은 usb c타입만 꽂을 수 있어 실패. 니콜라스가 옆에서 헤맬 때 나는 IT 강국의 자산, A부터 Z까지 알려주는 티스토리 박사님들의 조언을 따라 무선으로 미러링을 시도한다. 유료 애플리케이션으로 할 수 있다기에 받고서 프리미엄 3일 체험까지 신청한다. 미러링은 성공했으나 충돌이 있는지 넷플릭스만 들어가면 강제로 종료된다. 여기까지인가.


나름 생각하던 니콜라스가 아이디어를 낸다. 자기가 구매한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에 IP 주소를 바꿀 수 있는 VPN이 탑재돼 있다며, IP 주소를 한국이나 프랑스로 바꾸면 접속이 되지 않을까? 랩탑에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당연히 이 작전도 먹히지 않는다. IP를 바꾸면 뭐해, 숙소에서 넷플릭스 접근을 막아놓은 건데. 덕분에 난 유료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공짜로 얻는다.


© Nicolas Riou

포기하고 휴대폰을 켠다. 큰 화면으로 보면 더 좋았겠지만, 할 수 있는 걸 다 시도해 보고서 안 되는 걸 깨달은 기분도 좋다. 포기할 때는 할 만큼 해야 후회가 없는 거니까. 넓은 방 넓은 침대에서 조그마한 휴대폰 액정으로 ‘기묘한 이야기’ 시즌 1 첫 에피소드를 시작한다. 엎드려 보다가 누워서 보다가 십 분마다 팔을 바꿔가며 들어가며. 작은 화면에 더 작은 자막에 인상은 오만상 찡그린다. (우리는 시리즈를 볼 때도 영어 자막으로 봐야 한다. 프랑스어 자막과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띄울 수 없으니까.)


비 오는 밤, 실종된 친구를 찾아 나선 세 꼬마 아이가 깜깜한 숲에서 삭발한 소녀를 마주치며 에피소드가 끝나 버린다. 이 이상한 삭발 소녀를 숨겨준 아저씨는 이미 살해당했고. 아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두 번째 에피소드를 재생하고 세 번째 네 번째까지 4시간을 내리 누워 본다. 몰입하니 배가 덜 아프고 화장실도 덜 간다. 아, 이거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내가 경계하던 허무. 허무함이 찾아온다.


“근데 우리 왜 이렇게 넷플릭스에 목매는 거야?”


때아닌 와이파이 투쟁으로 혼란해져 진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래, 우린 인터넷의 노예가 아니잖아.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다. 더군다나 우린 그 아름답다는 발리에 있는 걸! 배에 수건을 두르고 바깥 의자에 앉는다. 논 한가운데 숙소. 살랑이는 한겨울 발리의 바람. 덩굴 잎과 연보랏빛 꽃잎이 하늘하늘 움직이고 벌들이 날아다닌다. 개미가 니콜라스 손등을 타고 오른다. 털이 수북한 그의 손에서 길 잃은 개미를 본다. 놓아준 개미가 어디로 가는지, 다들 어디에 모여 있는지, 모든 생명을 신기하게 관찰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이야기’ 보다도 더 흥미롭다. 아마 부모님이 된다면 아이들을 보는 모습이 이런 느낌일까.


© Yoonhye Jeon

초록 날개를 가진 말벌이 두어 마리 날아든다. 엄지손가락만큼 큰 놈이다. 날개 소리에 소름이 번쩍, 순간 얼음이 된다. 앞에 놓인 꽃 화분으로 돌아간 그 큰 벌을 보며 깨닫는다. 말벌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말벌이 영어로 뭔지 모른다는 것을. 하나 더 깨닫는다. 말벌은 얄쌍하고 공격적인 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럼 얘처럼 큰 벌은 뭐라고 부르지? 왕벌? 왕말벌? 니콜라스는 태연하게 프랑스에선 말벌을 guêpe, frelon, bourdon 세 가지로 나눠 부른단다. 내가 생각하던 그 얄쌍한 벌(알고 보니 쌍살벌)은 frelon asiatique라고 부른다며, 그 벌 일본에서 온 거 아니냐고 묻는 니콜라스. 내 대답은 “음, 모르겠어.”


정말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관심사가 다른 두 사람이 국적까지 다르다면 어떨까? 처음엔 나도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먼저 관심사가 다르니까 서로 아는 분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고, 서로 설명해 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더 공부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각자 나라에서는 그 주제를 뭐라고 부르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국가라는 틀 아래 각자의 언어로만 사고해 온 방식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외국인인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현상을 보게 된다. 아, 하나 더 있다! 손짓 발짓 대화하다 보니 날카로움도 줄어든다. 진지하게 한 얘기가 얼추 이해되는 것 같으면 즐겁다. 뭉뚱그려 말하기의 즐거움. 좋게 말해 수용의 폭이 넓어지는 것, 나쁘게 말해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 어찌 됐든 좋기는 매한가지!


© Nicolas Riou

다시 말벌로 돌아가, 나는 우리나라에서 왕벌과 말벌, 호박벌을 혼용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진짜 큰 놈은 장수말벌이라 하는구나. 그다음으로 큰 녀석은 꼬마장수말벌. “Kid General ...” 니콜라스에게 번역을 해 주다가 웃음이 터진다. “우리나라에서 큰 것들엔 주로 ‘장수general’를 많이 붙여.” 겸연쩍게 웃으며 “너무 어려워. 그냥 장수말벌은 너희 나라의 frelon이야. 영어로는 hornet!” 뜻하지 않은 영어 공부에 누가누가 큰 벌을 봤나 허풍도 치고 내기도 하다 드디어 진짜 주제인 인도네시아 벌로 접어든다. 우리가 본 엄청나게 크고 뚱뚱한 그 벌은 Megascolia procer라는 거대 말벌이다. 발리 바로 옆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에서 발견됐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벌 중에 하나란다. 날개를 펼친 길이가 11cm나 된다고 하니 놀라지 말길. 엄지손가락만하다 한 나의 표현은 뻥이 아니다.


© Nicolas Riou


즐거운 문 앞 나들이를 끝내고 들어와 ‘기묘한 이야기’를 이어 튼다. 아픈데도 이렇게 즐겁다니. 인터넷으로 눈앞의 풍경도, 딴 세상 이야기도 모두 즐길 수 있구나. 우리는 인터넷의 노예구나! 6년 전 인도 여행을 할 때 만난 세계 일주 오빠의 마음이 드디어 이해가 된다. 일주일 정도 같이 여행한 그 오빠는 와이파이를 찾을 때마다 불법 다운로드 프로그램으로 한국 예능을 그렇게나 다운로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받아놓고는 왜 보지는 않아?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혹시나’. 여행도 사람이 하는 일. 아파서 아무 데도 못 나갈 때, 그냥 나가기 싫을 때, 어딘가에 갇힐 때, 여행하다 우리나라가 그리울 때.


우리는 하루 만에 ‘기묘한 이야기’ 시즌 1의 여덟 개 에피소드를 다 보고야 만다. 시즌 2는 태국으로 출국하는 날 발리 공항에서 마저 다운로드할 것이다. 마닐라 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혹시 모르니까. Just in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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