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고 싶다면, 발리 울루와뚜 비치
많이 알려진 여행지일수록 힙하기 어렵다. 나는 알고 남은 모르는 곳에 있어야 유지되는 게 힙이니까. 비밀스럽고 꽤나 쿨해서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으쓱해지는 느낌. 사람이 많은 순간 그 분위기를 잃는 곳. 필히 그 느낌은 젊어야 한다. 발리에 온 뒤로 날것처럼 보이도록 세련되게 포장한 그 느낌을 아직 받지 못했다. 왜, 그런 혈기 넘치는 느낌 있지 않나. 그런데 이곳은 다니는 곳마다 가족적이고, 연인적인, 무언가 수동적인 느낌이다. 아마 너무 잘 꾸며진 휴양지인 탓일 거다.
발리에서의 목표 중 하나는 ‘서핑’이다. 서핑 장소로 사랑받는 포인트는 주로 서쪽 해변으로 우기(11~4월)를 제외하곤 파도가 내내 길고 곧게 뻗는다. 유명한 꾸따Kuta나 짱구Canggu는 서퍼들로 붐빌 풍경에 구미가 안 당긴다. 그러던 차에 본 한 장의 사진이 우릴 울루와뚜Uluwatu로 이끈다. 절벽 바다 뒤로 해가 지는 풍경, 서핑 중상급이라면 도전할 만한 곳이라는 코멘트. 우리는 하급이니 서핑은 패스하더라도 그곳에 꼭 가고 싶다. 여행을 하다 보면 꼭 그런 장소가 있다. 굳이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곳.
울루와뚜는 발리 최남단에 위치해 우붓에서 2시간, 꾸따에서 40분~1시간 정도 걸린다. 배탈이 난 상태에서 스쿠터로 왕복 4시간은 무리. 꼭 가기로 한 그 약속은 출국 전날까지 밀려 버린다. 출국 전날 스쿠터를 반납하러 꾸따로 향한다. 그곳에서 하루 자고 내일 아침 공항으로 갈 것이다. 남들 다 한다는 요가랑 그네 타기 대신 산속에서 협박당하고 배탈 얻은 우리만의 우붓에 작별을 고한다. 여전히 꾸따는 호객이 성행이고 골목골목은 미로 같다. 체크인을 하고 나니 갑작스레 발리를 떠나는 게 실감 난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음에도 그 맛있다는 돼지고기 요리 바비 굴링 Babi Guling을 못 먹고 떠난다는 게 아쉽고, 울루와뚜에 못 간 것도 아쉽다. 니콜라스는 그 근방에 핫하다는 클럽 옴니아Omnia도 가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에라 모르겠다, 다 해 버리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야.
일대에서 유명하다는 바비 굴링 집에 가니 한 서양인 유튜버가 식탁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밥을 먹는다. 맛있게 먹는 유튜버와 달리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전형적인 프랑스인 니콜라스는 그저 그렇다. 더 큰 난관은 매운 것도 못 먹는 전형적인 프랑스인에게 바비 굴링 소스가 너무 맵다는 것. 매운맛이 느끼함을 잡아주는 건데, 느끼함도 매운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고 땀만 연신 흘리는 그를 보니 철저히 한국 입맛의 음식을 강행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반이나 남긴 그와 달리 나는 오랜만에 먹는 자극적인 맛에 끌려 끝까지 먹고 만다.
실컷 먹어놓고 복통에 시달리며 울루와뚜로 떠난다. 니콜라스 등 뒤로 짐짝처럼 매달려 한참 남쪽으로 내려오니 거대하게 솟은 동상을 만난다. 공항에서부터 보이는 이 동상은 마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님처럼 온 발리 남부를 굽어본다(역사적인 장소는 아니고 조각 테마 파크의 일부다). 동상을 지나 마주치는 갈림길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비치를 향하는데, 우리는 울루와뚜 쪽으로 끝까지 들어가 서쪽(울루와뚜 사원)과 북쪽(빠당빠당Padang Padang 비치)을 나누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북쪽으로 틀어 올라간다. 이때부터 관광지 발리의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서핑 마을’이라 부를 만한 한적한 길이 나타난다. 도로는 야트막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한 고개 넘을 때마다 작은 호스텔과 카페들이 보인다. ‘나 좀 봐줘요’하는 활기찬 관광지와 달리 차분하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길 끝에 다다르니 앞으로 펼쳐지는 망망대해. 절벽 사이 조그맣고 깊숙하게 파고든 빠당빠당 비치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잠시 잠시 멈추고 고민한다. 여기를 갈까.
“울루와뚜 비치에 가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자.”
잠시 홀린 내 마음을 니콜라스가 다잡는다. (정말 현명한 대답이다.) 절벽을 따라 보도블록 깔린 도로를 달린다. 오른쪽으로 바다 내음이 느껴지고 왼쪽으로는 낮은 바닷가 집들이 이어진다. 울루와뚜 비치 앞에서 길이 끊긴다. 우리가 헤매는 사이 덩치 좋은 호주 아저씨가 비치로 가고 싶으면 이리로 내려가라며 10대 몇 명이 앉아 과자 먹고 담배 피우는 덤불을 가리킨다. 웜 슈트를 입고 오리발을 챙겨 맨발로 내려가는 아저씨를 놓칠 세라 따라간다. 세상에. 쓰레기와 벽돌들이 쌓인 덤불 길을 지나니 시멘트 계단이 나타난다. 좁은 골목에 서핑 샵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절벽엔 노란 전구를 두른 펍들이 발코니를 자랑한다. 이런 숨겨진 작은 곳이 있다니. 골목을 지나 내려가니 커다란 돌덩이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철썩-처얼썩- 오묘한 풍경.
‘이게 끝인가?’ 싶어 둘러보는데 한쪽 돌 틈에서 샌들을 손에 쥔 맨발 커플이 나온다. 이상하다. 저긴 파도가 들이치는 구멍인데?
“여기로 나가면 뭐가 있나요?”
“해변가Beach! 꼭 갔다 와요.”
찰박찰박 파도가 치는 동굴을 나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절벽에 입이 떡 벌어진다. 거기 달라붙은 작은 모래사장. 우리는 파도가 깎은 둥그런 공간을 차양삼아 물살을 헤친다. 입구를 알 수 없어서일까? 선택받은 이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어떤 비밀의 공간 같은 느낌이다. 물이라도 차는 날엔 못 들어갈 테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방문했는데 밀물이라 비치까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모래톱은 얕지만 한적하고 아늑하다. 뜬금없는 난파선 잔해가 나름의 히피스러움도 풍긴다. 바닥이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진 터라 수영을 즐기긴 어렵지만 멀리서 몇 겹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그리고 그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포인트가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크고 작은 파도들이 서너 개의 줄을 이루며 밀려든다. 숙련된 서퍼들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끊임없이 파도를 탄다. 타월을 깔고 따뜻한 해를 맞으며 잠시 눈을 붙인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구나.
해가 낮아지자 서퍼들이 하나둘 퇴근한다. 물이 많이 빠져 파도를 타기 어려운 탓이다. 바다가 어찌나 얕아졌는지 아득히 먼 곳에서 걸어온다. 허니문 촬영을 온 듯한 커플이 지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빠와 아이가 모래성을 쌓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작은 물고기들이 바위 웅덩이에서 헤엄치고 멀리 몇 척의 고깃배가 해를 가렸다 내었다 한다. 일몰이 아름다운 발리, 울루와뚜의 일몰은 특히 더 아름답다. 물론 발코니 위에서 맥주 한 잔 하며 보는 것이나, 인피니티풀에서 보는 선셋도 멋지겠지만 조용하게 내려가는 해와 함께 낮아지는 바닷물, 그러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의 검은 맨몸이 참 성스럽고도 멋지다.
끝을 뜻하는 울루ulu 절벽(바위)을 뜻하는 와뚜watu. 절벽의 끝. 발리인들은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유명한 울루와뚜 사원을 세운 걸지도. 이 시간이면 사원에서는 전통 공연을 하고 비치 끝에서는 힙하고 싶은 클럽들이 저마다 발코니를 내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진짜 힙은 아래에 있다. 클럽에서 어렴풋이 흘러나오는 라운지 뮤직을 들으면서 즐기는 일몰이 어찌나 낭만적이고 감상스러운지. 오고 싶은 사람만 오는 곳. Show-off(뽐내기)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는 곳. 젊은 사람들이 적당히 많아 활기차고 자유로운 곳. 울루와투로 오는 길이 그렇고 이곳으로 오는 서퍼들이 그렇다. 그런 서퍼들이 만든 이 동네가 그렇고, 사원도 아니고 루프탑 바도 아닌, 그 아래 숨겨진 비치가 그렇다.
발리에서 스미냑과 우붓, 누사두아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많은 것이 오픈돼 있어 무엇이든 쉽게 즐길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이것이 정보인지 광고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직접 가 보아야만 정말 좋은 곳과 포장된 곳을 구별할 수 있어 실망할 여지도 크다. 여행의 많은 기분이 택시 기사나 가이드, 여행사 재량으로 한껏 달라지는 것을 본다. 전역이 관광으로 먹고사는 발리이기에 특히나. 울루와뚜는 상대적으로 멀어서 제쳐두거나, 혹은 사원과 몇몇 비치, 비치 클럽을 묶어 남부 당일치기로 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개가 절벽 위의 울루와뚜 사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울루와뚜에 온다면 사원보다 이곳을 들러야 한다고. 하루를 꼬박 머물러도 가치 있는 곳이라고. 청춘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곳. 하루종인 멋들어진 서퍼들의 기교를 볼 수 있는 곳. 저녁 무렵이면 칠Chill한 음악이 들리는 곳. (오늘은 배가 아파 못 마셨지만... 이 풍경에 빈땅이라도 마신다면 금상첨화.) 좁은 동굴과 바다를 건너야 만나는 작은 모래사장에서 쬐던 해, 드러나는 바위들, 발리에서 느끼지 못하는 어떤 다른 분위기,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발리의 교통체증을 뚫으며 꾸따로 돌아가는 길에 스쿠터를 몰던 니콜라스가 말한다. 서핑은 못 했지만, 노래 노래 부르던 클럽 옴니아도 못 갔지만, 울루와뚜가 너무 멋져서 괜찮다며.
“윤혜, 이다음에 발리에 오면 울루와뚜에 머무르자.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