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축복인지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음식에 대해 스트레스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천국이었지. 짜고, 맵고, 달고, 향긋한 모든 맛을 느낄 수 있는 천국. 베트남 쌀국수와 파인애플 볶음밥, 태국 팟타이, 똠양꿍, 코코넛 커리, 인도네시아의 나시 고렝. 한국 사람이 사랑해 마지않는 음식들. 동남아 여행의 낙 역시 맛집 찾아 현지 입맛을 즐기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어서, 이들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랐다. 니콜라스와 여행하기 전까지는.
니콜라스는 프랑스인답게 빵과 치즈, 고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고 그 감별하는 입이 굉장히 까다롭다. 시드니에서도 그랬다. 고기 감자 빵 먹는 나라니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한 오산이었다. 많은 것이 공산화 대량화된 호주의 식료품은 그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웠고 프랑스에서 수입한 좋은 재료들은 ‘엄청나게 비쌌다’. 프랑스 치즈 한 덩어리가 80달러에 팔리곤 했으니까. 그는 고향의 음식 곧 프랑스의 크루아상, 치즈, 푸아그라와 자신들의 소시지를 그리워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엄마가 직접 육수 낸 된장찌개만 먹다가 남의 나라에서 몇 개월 동안 MSG 된장국을 먹은 셈이다. 맛있는 김치찌개, 갈비찜, 감자탕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겸사겸사 그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소금을 끊었고 아침에 간단하게 꿀과 토스트, 과일, 요거트를 먹은 뒤 점심은 닭가슴살이나 삶은 파스타, 저녁은 흰 살 생선에 후추만 뿌려 먹었다. 대단한 정신력으로 4개월을 그렇게 지냈다. 그 생활을 버티기 위해 이따금 정말 좋은 음식을 비싼 돈 주고 먹곤 했다. 한국식 바비큐 식당에서 소고기 모둠을 먹거나 프렌치 레스토랑에 간 기쁜 기억으로 남은 시간을 버텼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무려 200달러를 쓰고 또 다른 기쁨을 얻었는데, 슬슬 두 달이 되어가니 그 기쁨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리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프랑스인에게 아시아 음식이 힘든 이유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1. 일단 양 자체가 너무 적고 2. 고기보다 채소가 많으며 3. 콩이나 생선으로 발효한 소스가 생소하고 4. 향신료가 강하고(매운 것 포함) 5. 자신들은 국물 요리를 즐기지 않으며 6. 무엇보다 쌀에 익숙지 않고 7. 이곳의 면에도 익숙지 않고 8. 그 둘을 대신해 탄수화물을 대체해 줄 감자 요리도 없다는 것이다. 니콜라스의 경우 장기간 다이어트로 인해 닭고기는 웬만하면 거르고, 태생적으로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터라 고를 수 있는 고기의 가짓수도 줄어든다. 특히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돼지고기를 먹는 힌두 터전 발리의 강점이 무색해진다.
처음에는 그를 너무 깐깐하다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해야 할 밥 시간이 그에게 스트레스가 되어가는 걸 목격하자 한편으론 짠한 감정이 든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밥을 먹는 나에게 매일매일 파스타나 빵만 먹으라고 하면 그것 참 고역일 것이다. 밥이라 해도 풀풀 날리는 인디카Indica 쌀로 지은 이곳의 밥으로는 성에 안 찰 테고. 하물며 빵이 주식인 그가 매번 밥을 먹어야 한다면 그것도 참 고역일 테다. 그렇다면 면을 먹어야 할까? 이곳의 튀기고 볶은 면, 혹은 국물 면은 서양의 삶은 파스타와 아예 종류가 달라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그와 다니고서야 관광지에 왜 이렇게 피자집과 버거집이 많은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동남아 음식을 못 먹는 서양 사람들을 위한 곳이구나.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식당을 찾거나 숙소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처럼.
그렇다면 니콜라스는 대체 무엇을 먹어야 하나. 별도리가 없다. 조금만 힘을 내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는 것뿐. 발리에 도착한 다음날 조식으로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인 나시 고렝Nasi Goreng을 먹고 점심에는 로컬 식당에서 새큰달달한 야채 볶음인 찹차이Cap Cay를, 저녁엔 맑은 닭고기 국인 소또 아얌Soto Ayam을, 다음날 아침에는 볶음면 미 고렝Mie Goreng을 시도한다.
니콜라스는 달고 짠 감칠맛의 나시 고렝이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이다. 하나로는 양이 부족해 점점 나시고렝을 애피타이저 혹은 사이드 메뉴쯤으로 생각하고 먹기 시작한다. 내가 비빔밥의 일종인 나시 짬뿌르Nasi Campur를 먹을 때도, 발리식 땅콩 소스에 찍어먹는 꼬치인 사테Satay를 먹을 때도, 찹차이를 먹을 때도 그는 항상 나시 고렝이다. 실패할 염려가 없고, 탄수화물도 채워진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시 고렝을 제외하고 그가 즐겼던 음식은 사테 정도. 사테는 양이 적어 두 접시 세 접시씩 시키곤 했다. 고향 음식이 그리운 날엔 스테이크나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주문해 보지만 양이나 퀄리티에 크게 실망하고 이후로는 그도 마음을 굳힌다. 이왕 먹을 거 현지식에 집중하자고.
그렇게 니콜라스는 나시 고렝 마스터가 되어간다. 다시 말해 단짠의 마스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단짠'이란 개념이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다. 단 음식과 짠 음식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프랑스인에게 '단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아침 식사로 짠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단맛과 짠맛을 번갈아 먹는 것도 불허하고, 단 음식을 먹고서는 절대 짠 음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짠 음식은 메인이고 단 음식은 음료고 디저트다. 예를 들어 크레이프에는 단 크레이프와 짠 크레이프가 있는데, 단이냐 짠이냐에 따라 넣는 밀가루부터가 달라지며, 절대 단 크레이프와 짠 크레이프를 같이 먹지 않는다.
니콜라스는 나날이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고 있다. 나를 만나고 매운 음식에 대한 능력치가 현저히 늘었고 자신도 굉장히 뿌듯해 한다. 고추 소스가 든 바비 굴링도 반이나 먹을 수 있음도 그 덕이다. 프랑스는 매운 음식이 ‘하나도’ 없어서 매운 음식엔 아기 혀 수준이다. 양념치킨이나 곰탕에 뿌린 생파조차도 매워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니콜라스가 매운 것과 함께 이제는 자신의 단짠을 계발시키고 있다.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니 한국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르겠다. 매운 것, 짠 것, 단 것, 달고 짠 것, 신 것, 쓴 것, 돼지고기, 나물, 채소, 향신료, 국물, 볶음, 찜, 구이, 조림, 부침, 밥, 면, 떡, 빵, 고루고루 먹을 줄 안다는 것. 달래와 미나리의 향긋한 향을 음미할 줄 알고 베트남의 고수와 지중해의 로즈메리도 함께 즐길 줄 아는 나라. 싱싱한 회와 해산물, 숙성한 소고기와 삶은 돼지고기, 발효한 콩과 채소, 생 숙주나물과 양파 마늘의 아린 맛까지 즐기는 나라. 나라마다 선호하는 재료들을 익숙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 니콜라스와 다니며 더욱 깨닫는다. 그에게 발리는 나시 고렝이고 나시 고렝은 발리였기 때문에.
발리를 떠나기 전날 밤. 한계에 다다른 그가 서양 음식을 찾는다. 구글맵에서 Pizza를 치고 주저 없이 별점이 가장 높은 피자집으로 간다. 오늘은 가격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시드니에서 그랬듯 이 한 끼가 그에게 얼마간 버틸 기쁨을 줄 거니까. 속 안 좋은 나는 콜라나 한 잔 시켜 마시니, 한 판이 오롯이 그의 몫이다. 성스럽게 손을 씻고 온 니콜라스는 기대되는 듯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데, 이거 이거 진짜 행복한 미소다. 아마 내가 시드니에서 해장국을 발견했을 때 그가 본 미소랑 같은 것일 테지. 그 환한 미소에 보는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