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왔어

진짜 마닐라 1

by 전윤혜


거창히 ‘동남아시아 일주’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우리는 무지했다. 태평양은 처음인 니콜라스와 먹으러 베트남에 다녀온 게 고작인 나. 각자의 작은 기대라면 나는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와트를 보는 것, 니콜라스는 필리핀에 가는 것 정도. 갈 곳을 정하며 나라마다 선호하는 여행지가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음식 맛있고 여행하기 편리한 인도차이나 반도를 좋아하는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은 필리핀, 발리, 뉴칼레도니아처럼 이국적인 섬나라를 선호했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부터 시작해 어디로 가야 할까? 답은 쉬웠다. 시작지는 시드니 발 비행기 표가 가장 싼 도시가 될 것이다.


마닐라Manila. 나는 한국인에게 관광 이미지가 이미 다 소비되어 버린 필리핀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늘 그렇듯 파격적인 가격 차는 없는 선택지도 생기게 만든다. 그곳에서 덜 관광화된 섬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첫 숙소만 예약해 놓은 채 밤 비행기로 도착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끼친다. 동남아 일주를 다녀온 친구들이 하나같이 추천하지 않은 이 곳. 아무도 선호 않는 미지의 도시에 떨어진 기분이다.


유심은 하나만 산다. 데이터는 꼭 필요할 때만 핫스팟으로 나눠 쓰기로 한다. 서로 이야기하는데 다음 행선지를 검색하지 않을 거고, 좋은 풍경이 앞에 있는데 구글맵을 확인하느라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핸드폰으로 하는 여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만의 여행을 하자. 니콜라스의 방식이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다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와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위한 공사판, 해 뜨면 더러워 보일 작은 강 위로 참으로 노란 달이 둥실 떠 있다. 늦게까지 연 몇몇 허름한 노점에서도 같은 빛이 새어 나온다. 문 열면 대로변인 조그만 방에선 홀로 밥 먹는 아저씨가 보인다.


비좁은 골목 끝까지 택시 기사가 굳이 들어와 준다. 우릴 내려 주며 이 동네, 사람이 많고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애플리케이션에서 예약한 숙소는 1990년대 모텔 같다. 방에 들어서니 막 청소한 듯한 싸구려 방향제 냄새. 구형 에어컨이 털털거린다. 영화 속에 떨어진 기분. 다음날엔 뭘 할까? 우리가 마닐라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세부, 보라카이는 익숙해도 마닐라라.... 검색해 보니 근교의 폭포 관광뿐. 비즈니스차 들린 이들이 아쉽지 않도록 하루 정도 관광할 수 있게 개발한 듯한 상품 느낌이다. 우린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왔어. 남들이 간다고 다 갈 필욘 없지.


숙소에 물으니 익숙한 듯 종이를 내민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하고서 처음 세운 마을. 중세 성벽으로 둘러 싸인 구시가. 와, 여기서 진짜 멀다. 우리 숙소는 모든 곳과도 멀다. 차라리 잘 됐다, 천천히 종일 걸어서 거기까지 가 보자. 이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도시를 모를 땐 그 근원을 거슬러 보는 것도 좋을 테다. 도시를 만드는 것은 물이다. 섬나라 필리핀, 바다에 면한 수도 마닐라, 마닐라를 가로지르는 강 그리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정보인 구시가. 루트가 만들어진다.


“니코, 우리 택시 타고 오면서 강Pasig River 봤잖아. 아마 그 강이 마닐라의 젖줄 같은 거겠지? 따라가 보자. 강 가는 길에 대학교가 있는데 거긴 어때? 그리고 강을 건너서 인트라무로스로 가는 거야.”




다음날 길을 나서니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 길거리에 나온 닭들, 딱지 치는 아이들. 어젯밤엔 그렇게도 무섭던 골목이 천진한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있다. 도로변엔 물 많이 섞은 날림 콘크리트 건물들이 즐비하다. 엉켜 있는 전깃줄들이 마치 작품 같다. 스쿠터 뒤로는 검은 매연. 매캐한 싸구려 휘발유 냄새가 훅 끼친다. 동남아시아가 처음일 니콜라스가 걱정되던 찰나, 걱정이 무색케도 신나서 여기저기 난리다.


“윤혜! 맡아 봐. 휘발유 냄새야. (잠시 차가 지나간다.) 이 냄새는 어때? 다른 게 느껴져? 경유와 휘발유는 냄새가 달라. 휘발유가 조금 입체적이지. 난 휘발유 냄새가 좋아. 꼭 모터바이크를 타는 것 같거든. 기름 넣고 막 떠나기 직전의 설렘. 그건 좋아하는 사람만 알 거야. 하!”


“뭐? 기름이 냄새로 구분이 돼? 그리고 넌... 이 냄새가 좋다고?”


나는 머리가 어지러운데. 숨을 들이켜 본다. 뜨거운 태양에 경적 소리, 매연 그리고 뭔가 모를 금속 냄새. 공기가 습하니 원, 이건 인도India보다 더 심하다. 아, 이게 바로 마닐라일까?


Politechnic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 Yoonhye Jeon


기찻길을 건너 대학교에 도착한다. 녹조 낀 연못은 여기에도 있고 조금 지저분하지만 저렴한 구내식당도 있다. 혼밥하는 학생들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이 이 더운 날 대부분이 스키니를 입고 다닌다. 그리고 커플이 없다. 설사 있더라도 손도 잡지 않고 애정 표현도 하지 않는다. 아, 여기. 학생들이 무언가 자유롭지 못하구나. 학생들은 흰 피부의 우리를 신기해하면서도 경계한다. 짧은 바지 민소매 차림에 남자와 자유롭게 붙어 다니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들을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기숙사 한편에 레인보우(동성애 지지) 현수막이 펄럭인다. 새롭고자 하지만 사회에 순응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 여러모로 한국의 옛 모습이 겹친다.


교문을 나서니 하천을 따라 선 판잣집들. 그 앞으로 덩굴진 꽃나무가 자유롭게 흔들린다. 강 근처로 가자 군인들이 검문을 한다. 대통령 관저가 있는 곳이란다. 갑자기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 깨끗하고 넓은 도로와 매연 없는 공기, 잘 관리된 나무들. 한 목조 건물에 사람들이 많길래 물어봤더니 오늘 공무원 면접이 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한다지만, 예상과 달리 필리핀 시민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아저씨는 사람들 앞에서 영어 실력을 뽐낼 수 있어 한껏 들떠 있다.


판잣집 앞 나무나 대통령 관저의 나무나 자유로이 흔들리는 건 같다. © Yoonhye Jeon


길을 건너 성당을 만난다. 앞엔 검을 들고 용을 잡는 천사 상이 있고 안으로는 도자기 인형처럼 채색된 성상들이 서 있다. 신부와 수녀, 예수님과 신도의 상들은 서양의 그것과 필리핀 토착의 절반쯤 되는 모습이다. 한 외부의 종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되었을 때 어떤 예술 양식을 가지는가. 그저 가톨릭이 국교라고만 알았던 필리핀의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입구엔 교회chruch나 성당cathedral이 아닌 성지(사당)shrine이라 쓰여 있다. 어느 성당에는 검은 피부를 가진 예수님 상도 있다던데. 마치 우리나라에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이 고수레를 지내고 서낭당에 빌고 부적을 지녔던 것처럼, 필리핀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 자연스레 존재하던 믿음과 스페인이 들여온 가톨릭을 함께 의지하고 있다.


건물 꼭대기 합판이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 거다. © Yoonhye Jeon


반나절도 채 걷지 않았는데 마닐라를 알 것만 같다. 철근이 다 노출된 허름한 아파트와 촌스런 유리 빌딩이 나란히 선 도시. 소음과 습기와 매연이 섞인 도시. 영어와 필리핀어가 혼재되어 떠다니는 도시. 엉킨 전깃줄처럼 삶이 뒤섞인 도시. 그들의 가톨릭에서 민간 신앙이 보이듯, 요소요소들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떼어낼 수 없이 엉긴 도시. 흐릿한 도시. 진짜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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