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마닐라 2
마닐라의 젖Pasig River을 따라 걷는다. 강가는 주로 나무가 물에 잠긴 형국이고 폭은 한강의 1/3쯤 돼 보인다. 강변 도로가 조성돼 있지 않아서 골목골목을 헤쳐야 강가에 다가갈 수 있다. 땀이 비 오듯 하지만 즐겁다. 니콜라스의 빨간 얼굴을 보며 놀린다. 하얀 피부는 정말 쉽게 빨개지는구나. 작은 철교를 따라 강을 건넌다. 다리 중턱엔 자그만 섬이 있고 전깃줄이 강을 가로질러 섬까지 떠 있다. 나무가 풍성해 언뜻 선유도 같기도 한 것이 궁금했는데 접근이 금지된 병원이라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강 한가운데 통제된 병원이라니. 더 궁금해진다. 저 멀리 회유리빛 고층 건물들이 해를 반사한다. 강 주변으론 높은 크레인이 새 건물을 쌓는다. 철교의 아치와 크레인이 굽고 때론 높은 그림자를 낳는다. 작은 모터 배가 지나자 물결을 따라 폐플라스틱이 넘실댄다.
다리 위에서 감상에 빠져 있다가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그래, 우리 마닐라에 있지. 조심해야 해. 정신 바짝 차리고 걷고 걸어 인트라무로스에 도착한다. 파시그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인트라무로스. 안intra, 벽muros. 이름처럼 두꺼운 돌벽으로 둘러 싸인 반원형의 올드 타운이자 각 귀퉁이에 바다 멀리 적 함대를 볼 망루를 둔 스페인 제국의 흔적이다(스페인은 16세기 말엽부터 약 300여 년간 필리핀을 속국으로 두었다). 많은 건물들을 급속히 부수고 지어버린 바깥 세계와 달리, 보존이 잘 돼 있어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300년 전에도 누군가가 밀었을 무거운 나무문을 밀고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하얀 분수가 있는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들. 어느 귀족의 집이었겠지. 더워서일까? 거리에도 레스토랑에도 사람이 없다. 박물관으로 가 본다. 초기 귀족들의 집을 장식했던 가구와 성상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상들은 눈이 없고 머리가 큰 당시의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중세의 회화가 박제된 듯. 유럽의 유행은 꾸준히 변했겠지만, 지구 반 바퀴 돌아 스타일을 수입해야 했던 식민지의 예술은 그렇게 정체되었을 테다.
“윤혜, 이 사람들 왜 손들이 없을까?” 손이 잘린 성상 앞에 서서 니코가 묻는다.
“가장 튀어나온 손이 부서지는 건 당연하잖아. 흉상에 코가 없는 것처럼.” 시니컬히 대답한다.
“오 마이 갓, 너무 불쌍해. 이 사람에겐 돌출된 부분이라곤 고작 왼손 하나뿐이잖아. 그 소중한 걸 잃어버리게 만들다니...”
킥, 웃음이 터진다. 너와 나의 관점은 거의 물을 반이나 먹었네, 반이나 남았네 수준이다. 훗날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 오열할 지도. 텅 빈 박물관에서 시간이 멈춘 듯 우리도 중세에 머물러 있다.
가장 인기가 많다던 산 아구스틴 교회San Agustin Church에 가 본다. 내부를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고, 앞마당이 주차장이라 오고 가는 차들 통에 건물을 음미하기 참 어렵다. 인트라무로스의 웬만한 볼거리는 입장료를 각각 내야 하는데, 우린 돈 내고 보는 요새나 성당보다 외려 곁가지 곁골목으로 들어 주민들의 삶을 느끼는 게 즐겁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길거리 노숙자의 담뱃갑 컬렉션. 배열한 구도가 보통이 아니다. 머리 큰 목상들보다 훨씬 감각적이라 느낀다. 누군가에겐 그저 빈 말보로 갑이 누군가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영감이고 재산이 되었다. 매일 작은 싸리비로 요리조리 쓸며 아끼겠지. 슬쩍 미소가 난다. 니콜라스에게 가장 인상적인 곳이 어디냐 물었더니 불이 날 듯 엉켜 있던 전깃줄이란다. 우린 중세 도시에 왔지만 현재를 본다. 해가 진다. 동네 아이들은 엄마가 밥 지을 동안 골목골목 뛰어나와 술래잡기를 한다. 엉킨 전깃줄 아래서.
인트라무로스를 나와 마닐라 베이Manila Bay를 따라 걷는다. 해변에서 선셋을 보고 싶었지만 바다는 온통 공사 중이다. 쌓여 있는 쓰레기 양으로 보아선 공사는 중단된 지 오랜 듯하다. 탈진할 정도로 더워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어딘가 펍이 있을 거야. 구글맵에서 본 펍이 몰려 있는 듯한 장소로 가 본다. 사진으론 참 삐까뻔쩍해 보였는데... 허름한 골목이었고 허름한 가게. 여기도 손님은 우리뿐이다. 사장은 호주 할아버지. 벽엔 캥거루 그림이 걸려 있다. 호주를 떠나 처음 온 펍이 호주 펍이라니. 허탈해 함께 웃는다. 바에 앉아 필리핀 맥주를 종류별로 마셔 본다. 인조 가죽으로 마감된 인테리어들이 조금은 야시시한 80년대 시골 바에 온 것 같다. 저녁이 되니 갑자기 빨간 불이 켜진다. 으악 이거 뭐야! 원피스를 입은 언니들이 들어온(출근한)다. 언니들은 하릴없이 핸드폰이나 티비를 보며 손님들이 오길 기다린다. 맥주는 마셔야겠으니 꿋꿋이 앉아 있지만 어떤 의도의 ‘호주’ 펍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맥주는 레드호스Red Horse가 가장 낫다.
이 이야기를 하니 먼저 마닐라를 다녀온 스패니시 친구들도 똑같은 경험을 했단다. 펍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접대용 바였던 것. 마닐라는 관광객이 별로 없어 자연히 여행자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곳이 딱히 없다. 술집은 사업차 이곳에 온 이들이 들를 법한 곳들이 주를 이룬다. 친구들도 맥주 마실 장소가 정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찌 됐건 끝까지 마셨다고. 어쩌면 1970년대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이 자신네 펍 같은 곳을 찾아 헤매다 용산의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간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