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에서 선글라스 사기
팔라완 섬으로 떠나기 하루 전. 곧 모험이 시작되기 전날이다. 필요한 것은 니콜라스의 선글라스. 그가 들고 가려던 스포츠 고글을 보고 내가 질색하며 프랑스로 부친 탓이다. 용납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사 주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시내의 몰로 향한다. 지하철을 탄다. 열차는 깨끗하고 시민들은 친절하다. 와! 역사에선 떡볶이와 김밥도 판다. 꼬치를 하나씩 사더니 “뭐가 좋아?” 묻곤 내가 좋아하는 걸 날 준다. 환승하는 구름다리에서 마닐라 시내를 굽어 본다. 기찻길 옆 다 쓰러져 가는 집들, 다닥다닥 붙어 운전하는 차들. 문득 떠오르는 홍콩의 뒷골목. 영화 <중경삼림>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듯 우리도 붕 떠 있다. 강렬한 풍경을 만나면 니콜라스는 눈으로, 나는 카메라로 본다. 며칠간 너무 많이 찍어서 그가 지쳐할 것만 같다. 꾹꾹 눌러 참고 나도 눈으로 봐야지, 하고 있으니 자기도 슬쩍 카메라를 꺼낸다. 피식. 우리가 찍은 사진들을 본다. 니콜라스는 세로를 좋아하고 나는 가로를 좋아한다. 서로 좋아하는 느낌이 다르고 주목하는 곳이 다르다. 마음 아파하는 부분도 다르다.
“윤혜, 이 지하철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야만 했을까?”
“것보다 이 사람들, 어떻게 이런 작은 집에서 살 수 있을까? 비는 안 새나? 무너지진 않을까?”
"어, 사람들 티비는 보네. 그럼 괜찮을 거야."
평화롭게 사는 이들에게 과도한 걱정은 보내지 않기로 한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백화점으로 간다. 니콜라스가 분명 백화점이랬는데 가는 길이 시장통이다. 오늘은 씩씩하게 맵 안 보고 걸어 본다. 10페소를 주고 코코넛 주스 2잔을 산다. 코코넛을 바로 깎아서 플라스틱 컵에 담아주는 거리표 주스. 달고 시원하다. 검문을 거쳐 몰로 들어선다. 얇은 메탈 프레임의 블랙 선글라스나 브라운 선글라스를 생각한다. 레이밴, 휴고 보스, 프라다, 멋진 선글라스들이 진열돼 있다. 니콜라스는 한참을 보더니 오클리의 신소재 선글라스를 고른다. 나는 꿋꿋하게 레이밴의 브라운 선글라스를 권한다.
“너는 브라운이 잘 어울려.”
“브라운? 난 별로. 프랑스에서 브라운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하는 색이야.”
“아니면 이건 어때, 블랙이야. 아주 얇은 메탈 프레임. 이것도 너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돈을 훨씬 더 쓰더라도 필사적으로 스포츠 선글라스를 막고 싶었다. 사실 선물을 빌미로 내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여행하는 동안 그의 눈을 보호하는 목적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보는 니콜라스가 잘생기길 바랐다. 사진 속 그가 패셔너블하길 바랐다. 멋있으면 나 또한 항상 기분 좋을 테니까. 철저히 내 기준에 맞춰 그를 바꾸려 했다.
“윤혜, 내가 왜 오클리를 고른 것 같아? 너는 내게 여행할 때 필요한 선글라스를 사 주겠다고 했어. 이 선글라스만큼 가볍고, 햇빛을 확실히 차단해 주는 건 없어. 여행하는 동안 나는 모터바이크를 몰 거고, 바다에 갈 거고, 비와 땀에 젖을 거야. 아마 내가 휴고 보스를 산다면, 코받침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철테가 내 귀를 하루 종일 누르겠지. 그럼 선글라스를 또 사야 할 거야. 진짜 여행용으로.”
나는 아름다운 게 최고고 니콜라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한다. 아름다움은 취향을 타고 직감적일 때가 많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지만, 합리적인 선택은 말로 할 수 있다. 그 말들이 구구절절 맞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결국 계산하면서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는 내 기분을 읽은 그가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한다. 백화점을 나와 맥도널드에 앉는다. 그새 나는 시작부터 잘못됐다 원망한다. 니콜라스는 왜 이 작은 백화점을 선택했을까, 왜 이 작은 매장에서 가장 나은 것은 못 고를 망정 다시 또 내가 싫어하는 검정 무광 프레임의 스포츠용 선글라스를 사야 하는 거지? 싸고 멋진 레이밴, 혹은 비싸고 더 멋진 휴고 보스를 두고 왜 너는 비싸면서도 아저씨 같은 오클리를 선택하는 거야. 이 사람 프랑스인 맞아? 어쩌면 나는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파리지앵만을 프랑스인이라 여겼던 걸지도 모른다.
“윤혜, 넌 한 번도 네 선글라스가 무겁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 난 예뻐서 기분이 좋으면 모든 불편한 걸 감수할 수 있어.”
“지금은 작은 디테일들이 너무 크게 보일 거야. 네가 생각했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다시 봐봐. 멋있진 않지만 그 전 고글보다는 훨씬 낫지. 그 매장에서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무난한 걸 골랐어. 우리는 멋진 걸 포기한 게 아니라, 실용과 멋의 밸런스를 지킨 거야.”
그의 말도 맞다. 그러나 평생을 폼생폼사로 살아온 나. 머리론 이해하지만 마음은 힘들다. 내게 그건 밸런스가 아니라 멋을 포기한 거란 말이야.... 이 실용의 제왕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니코, 나는 좋아하는 것에 정도가 있어. 쉽게 숫자로 예를 들자. 1부터 100이 있다면, 최소한 50은 넘어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어. 자체의 아름다움에도 정도가 있고, 그게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에도 정도가 있잖아. 우린 아름다우면서도 잘 어울리는 걸 찾으려고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그 많은 옵션들을 염두하고서. 이렇게 모인 아이디어들이 하나의 멋진 룩을 만드는 거지. 이 선글라스는 아마 35쯤 될까? 네가 골랐기 때문에 샀지만, 그걸로 인해 내가 행복하진 않아. 나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미안하지만 아직까진 내 감각을 만족시키는 게 내 행복이야. 네가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당연히 신경도 안 쓰지. 넌 이미 내게 중요한 사람이잖아. 선글라스 낀 네 모습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거야. 마음에 든다고 얘기하진 않을 거야. 솔직힌 싫어. 미안해, 이게 나야. 그렇지만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볼게.”
니콜라스는 네 마음이 정 힘들다면, 차라리 날 위한 멋내기용 선글라스를 하나 더 사겠다고 한다. 내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다. 그 말만으로도 고맙다. 아, 그는 그저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그에게 내 만족을 위한 선물을 주려 했다. 여행을 위해서란 변명을 달고... 조금 부끄럽다. 한참을 오클리와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놀리며 하루 종일 내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맥주 마시러 가자.”
가는 길에 바다가 보여 바다 쪽으로 걷는다. 돈을 바라는 거지 아이들과 내심 우릴 기다리는 관광 마차를 뒤로하고,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발레리의 시를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숨결이 요약하는 시간의 신전, / 이 순수점純粹點에 나는 오르며 익숙해진다, / 바다를 향한 내 시선에 내 온통 둘러싸여. / 그리고 신들에게 바치는 내 최고의 봉헌물인 듯 / 잔잔한 반짝임이 / 깊은 자리 높은 자리에 지고한 경멸을 뿌린다. ㅡ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
여행을 떠나기 전,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관한 강의를 책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황현산 선생님은 우리가 살랑이는 나뭇잎을 보고 있을 때, 바다나 냇가에서 잔잔한 물결들을 보고 있을 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온다고 했다. 계속해서 반짝반짝해온 나뭇잎, 지금도, 앞으로도 반짝반짝할, 현재의 시간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것 같은 순간. ‘시간의 신전’은 그 순간. 계속되는 반짝임 속에 머무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고 현재만 계속 지속되는 것 같은 의식.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 작은 움직임들에 빠져든다. 붉은 해를 반사한 작디작은 반짝임들이 비리고 짠 바다 내음을 덮어 버린다. 우리의 사소한 다툼들이 부질없이 부서진다. 우린 그저 이 멋진 지구의 점 하나일 뿐인 것을... 어제와는 또 다른 마닐라 베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낭만적이다. 아, 그런데 새 선글라스 성능이 정말 좋구나...
혼자 낭만을 부렸나 보다. 이제 진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니코와 정처 없이 걷다가 나이트클럽에도 들어가 보고 술집에서 퇴짜도 맞고 겨우 한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발견한다. 3시간이 지나도록 손님은 우리뿐. 팔라완 다음으로 발리를 거쳐 푸켓으로 가는 비행기를 끊는다. 부족한 내 예산 탓에 몇 여행지들을 포기한다. 괜찮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더 돈을 많이 벌어서 가자- 예산 스트레스와 미안함으로 우는 나를 니콜라스가 다독인다. 한참 울고 나니 셰프가 기념사진을 찍자고 한다. 우리 맥주만 네 잔 마셨을 뿐인데.. 우리 사진이 어딘가 걸리려나?
지하철 역으로 돌아가는 길. 한인가를 지난다. 가게들이 텅 비어 있다. 아마 이틀 전 일어난 한국인 살인 사건의 여파인 듯하다. 한국인에게 마닐라는 위험하고 어둡고 비밀스러운 곳이다. 취약한 치안과 쉬운 유흥, 익명성.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종 몇 한국인 사업가들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돈이 많다는 인식을 심었을 것이며, 큰소리를 내고 유흥과 불법을 즐겼을 것 같다. 형언할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가 그걸 말해 준다. 웬만해선 두려움이 없는 내가 새삼 무서움을 느낀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스트레스받지 마. 내가 옆에 있어.”
꼭 잡은 손에 땀이 끈적하다. 그가 같이 있어 또 한 번 더 나는 남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고. 오늘을 돌아보니, 며칠의 마닐라를 돌아보니 그렇다. 마닐라의 마지막 밤. 그도 피곤하고 힘들지만, 지친 나를 위해 다리 마사지를 해 준다. 그렇게 오클리로 히스테리를 부린 내게...